2026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까?
셋의 경건한 후손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 가인의 후손들을 배우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네피림에 이끌려서 용사와 같은 자녀들을 낳으니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을 좇아가는 것이 행복으로 보였지만 실상 하나님의 눈에는 무서운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7절). 하나님께서 빠져버린 세상의 화려함과 명성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용사, 명예의 용사 그리고 세상의 화려함의 용사를 좇아가고 그것들이 행복의 비결로 여기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는 법죄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까? 그들의 ‘영적 간음’ 때문 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우상들을 좇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그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무언가를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며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었습니다. 8절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홍수 심판으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남겨두어 그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를 통해 그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좇아갔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을 했습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완전한 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작품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삶 속에서 그를 드러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까?
2026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단 한 사람의 지진’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졌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셔서 그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본문 말씀은 한 사람을 통해 인류 문화와 문명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을 통해 난 후손들이 세상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거주할 집(가인-성)이 만들어져서 안전을 보장했고, 먹을 것이 보장되었으며(야발-목축업),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음악(유발-수금과 퉁소)을 제공했으며, 편리한 삶을 위해 도구(두발가인-금속 공예)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그 후손이 세운 문화와 문명을 자신들의 만족과 욕망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화려하고 멋진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지만 하나님을 배제한 사람의 만족과 욕구를 위한 문화요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셋입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때부터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그들의 정체성(“에노스”:‘죽어야 할 사람’)을 깨닫고 구원자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셋과 그의 후손들이 그들이 부서져 죽게 된다는 영적 진리를 께닫고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아브라함이 나왔고, 아브라함을 통해 다윗이 나왔으며 그리고 다윗을 통해 예수가 나왔습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죄로 죽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셋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인의 후손처럼 육신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세상을 벗삼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멋진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지만 그들의 인생 끝은 멸망으로 끝났습니다. 반면에 멋진 문화와 문명을 만들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부서지고 깨져서 죽는 존재임을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갔던 셋의 후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떨치는 있습니까? ‘단 하나의 지진’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입니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의 후손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2026
흠향되는 예배
본문 말씀은 ‘최초의 살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살인은 예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예배)을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흠향 되었지만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최초 살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흠향 되지 않은 이유가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7절).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가인이 바르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바른 제사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4절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바른 제사는 믿음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어떤 믿음이 들어 있어야 합니까? 첫째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배 초점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의 구원에 감사하며 그리고 그의 자녀로 불러 주신 소명을 이루며 살겠다는 결단을 선포해야 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믿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지만, 반면에 가인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냥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잘못된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신 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예배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예배를 받으시게 합당한 분으로 믿는 믿음이 예배 속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배 속에 성령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성령 안에’의 의미입니다. 즉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취향과 선호 즉 우리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성령의 다스림 속에 드려져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아십니다. 우리들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회개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 주십니다.
2026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위대합니다.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느 사랑과 견줄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십니다(15절).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아담의 후손인 우리를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막 16:17-18). 마귀는 거짓과 술수로 우리 인생을 어렵게 만들 수는 있지만 결단코 우리를 망하게 하거나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절대로 파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7-39). 우리의 지식과 힘 때문에 우리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권세 때문에 우리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껏해야 우리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뿐 생명을 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범죄 후에 그들에게 있는 죄의 수치를 보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듯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을 받은 성도는 거듭난 영을 더럽게 하는 죄의 권세를 억누르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다스림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복과 은혜를 받는 길로 그리고 그의 상급을 받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2026
죄가 가져다 준 상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게 되면 상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1) 죄는 영적 상실을 가져옵니다(8절). 죄를 범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숨어야만 했습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영적 교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롬 1:21).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죄는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고집과 불순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가 깨져버립니다. 즉 영적 상실 속에 들어가고 맙니다. (2) 죄는 심적 상실을 가져옵니다(10절). 죄가 아담에게 들어오니 그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행복해하며 엄마 곁에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엄마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도망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사람도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 심령 안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 기도와 섬김 속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며, 예배와 기도를 소홀히 하며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3) 죄는 사회적 상실을 가져옵니다(12절). 아담이 범죄를 하자 그는 그의 허물을 하나님과 하와 탓으로 돌렸습니다. 죄는 인생 속에서 인간 관계의 상실 즉 사회적 상실을 가져옵니다. 로마서 1장은 죄의 산물을 증거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 수군, 비방 등등”.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부부 생활, 가정 생활, 교회 생활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 삶 속에 질서와 조화, 화평과 기쁨이 거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욕심과 욕망을 좇아가게 되면 부부 관계, 가족 관계, 다른 사람 간의 관계 등이 깨져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선포한 대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피 값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나태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죄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 상실이 아니라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삶 속에 참된 만족이 세워지게 됩니다.
2026
하나님 은혜의 법칙
에서와 야곱의 겉 모습의 삶을 보면 야곱은 에서의 뒤꿈치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에서는 능력과 재능이 겸비한 사람인 반면에 야곱은 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야곱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능력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선택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의 일꾼을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특출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세상 방식은 정반대이어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힘과 지식과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안 될 수가 있겠는가? 기도는 무능한 사람들이 하는 무능한 짓이지’ 등으로 기독교 신앙을 폄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이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기분은 ‘능력’이 ‘은혜’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은 성경 전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을 받은 것, 다윗이 언약의 주인공으로 선택을 받은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것,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선택 등등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힘과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며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자기 힘으로 성을 쌓고 그 성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도움을 펼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싫어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에게 은혜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주님, 저는 무능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모습은 세상 눈으로 보면 무능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께는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 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복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과 회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길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이 그의 가문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 된 것은 오롯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2026
죄의 시작(2)
)> 성도는 죄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죄는 교만과 욕심을 통로로 삼아 우리를 삼켜버립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5절) 교만과 욕심으로 인해 그만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신분을 잊은 채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을 품은 바람에 죄의 포로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와의 마음 속에 교만과 욕심이 들어가니 늘 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며,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잠언 25장 28절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성벽이 없으면, 성읍이 무너지만 인생의 모든 수고는 헛수고기 되고 맙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교만과 욕심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야만 절재의 열매를 통해 교만과 욕심을 다스리게 됩니다. 영적 암흑기이 사사 시대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좇아 살아갔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잘못된 교훈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라고 유혹을 합니다. 성도는 결단코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만과 탐욕의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4) 죄는 하나님 보다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마귀의 소리를,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와의 말을 들음으로써 죄를 범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소리 즉 사람의 소리를 좇아 살아갑니다. 베드로가 계집 종의 말을 들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 답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눈앞의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좇기보다는 이 세상의 소리를 좇아 갑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달콤한 말로 그리고 마치 인생 성공 비결 같은 소리로 유혹했을 떼 예수님을 환경과 상황에 따라 마귀의 소리를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갔습니다. 마귀는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말 속에 사랑과 관심 그리고 가치가 있는 것이 들어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거라면 그 소리를 좇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반드시 들어야 하며 그리고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
죄의 시작(1)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통하여 우리는 죄의 성격을 살펴서 죄를 지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 죄는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접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과 마음으로 살아가면 죄의 아름다움에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됩니다. 롯이 육신의 눈으로 소돔을 바라봤을 때 애굽 같았으며 에덴 동산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소돔이 멸망을 당할 때 그의 인생 역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를 화려하게 포장을 하여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와는 들짐승 중에 가장 영리했고 지혜로웠던 뱀을 통해 마귀가 다가오니 그만 외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여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죄의 실체를 보여주실 때 우리는 그것을 뿌리쳐야 합니다. 대적해야 합니다. (2) 죄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할 때 우리를 삼켜 버립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하와의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만과 의심을 보게 됩니다. “만지지도 말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와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죽을까 하노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확실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죄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지 말지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무시하고 이방신들을 우상으로 삼고 사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온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생각을 갖다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의심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밥이 되고 말았으며 아울러 예수님의 경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2026
하나는 드려야 합니다!
<하나는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그 안에 있는 하나만을 빼놓고 모든 것들을 그들의 임의대로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 즉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마저도 욕심을 냄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말았고 결국 모든 것들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신령한 복들과 이 땅의 기름진 복들을 주셨습니다. 인생의 깜부기가 인생의 열매를 헛되게 하지 않도록, 인생의 해충이 인생의 열매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인생 속에 이루어지는 모든 수고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물들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으며 또한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만큼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 하신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일 성수’입니다. 우리에게 6일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6일 동안 우리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중의 하루 즉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의 영광과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일주일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드려져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주일을 어기는 것은 탐심이요, 탐욕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나는 ‘십일조’ 입니다. 하나님이 10개 중의 9개를 우리의 것으로 주셨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하나를 우리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그를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을 갖도록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 하나 보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하나’를 드리지 않는 것은 탐심과 탐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요, 소유입니다. 은혜 가운데 주시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신령한 에덴 동산에서 살아가게 되는 영적 비결입니다. 영적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2026
변화 시키는 사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속한 땅 즉 인생을 악평을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속한 땅 즉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칭찬을 받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사명에 대한 것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행동으로 그의 사명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따라서 각자에게는 부르심의 목적 즉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사명, 야곱은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사명, 요셉은 가문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사명, 다윗은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사명,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 열 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사명이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는 충성과 헌신이 반드시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삶의 터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의 노역을, 요셉은 노예와 죄수의 삶을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무서운 십자가의 처형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명을 이루는 삶은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포기한 것들이 더 풍성하게 회복되며 또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의 사명을 이룬 사람들의 인생 결말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유명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명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이 자손들에게 약속의 복들이 부어지게 됩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에서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고, 그 열매들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나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사명을 이룰 때 일어납니다. 나로 인해 내 가정이, 내 교회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변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