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마땅히 해야 할 싸움
<마땅히 해야 할 싸움> 본문 말씀은 두 종류의 싸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북부 지역의 네 나라의 동맹국들과 남부 지역 다섯 나라의 동맹국들 간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권력, 돈 그리고 오기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 통에 인생이 부서진 사람이 있었는데 곧 롯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싸움을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화려함과 편리함을 좇아 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방법과 지식으로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런 롯이 세상 싸움 바람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인생을 도둑질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롯처럼 이 세상 싸움에 빠져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성도의 정체성을 깨닫고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전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 속에 있음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을 상대함이라” (에 6:11-12). 또 하나의 싸움은 아브라함이 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 동맹국들끼리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의 결과를 16절이 선포합니다. “다 찾아왔더라.” 성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그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육신의 눈으로 애굽에 내려 갔다가 비참한 인생을 만나고 말았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애굽의 비루한 삶으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롯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체하지 않고 롯을 구하려 싸움에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겨우 가신 318명을 데리고 네 나라 동맹국의 군사들과 싸웠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무모한 싸움처럼 보였지만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기에 무모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싸움에서 이겨 “다 찾아왔더라”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인생 속의 싸움에서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섬김에 있어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도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 넘고도 남는 파워를 갖게 합니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으면 환경과 상황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성도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예배와 섬김 그리고 기도 등을 등한히 하며 세상 싸움에 분주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시들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싸움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승리하게 되어 잃어버린 것을 ‘다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2026
나의 시선을 어디에!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에 따라 성공 인생 혹은 실패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말씀은 두 사람의 시선이 나오고 있습니다. 롯은 그의 시선을 보이는 것에, 완벽한 환경에 그리고 세상의 화려함과 편리함에 두고 살았습니다. 결국 이 시선이 그를 실패의 인생으로 이끌었습니다. 롯이 처음부터 소돔에 가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의 화려함과 편안함 그리고 완벽한 환경을 좇아가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의 눈에 악한 소돔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선포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인 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좇아 세상 것들을 좇아갑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교만하거나 혹은 얻지 못하면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어느 누구든지 욕심을 좇아 살아가면 그 마지막은 실패요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것을 좇아가고 있었을 때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가나안 땅”은 물리적인 땅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개념 즉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땅이요, 보여주신 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눈으로 살아가는 바람에 큰 낭패를 한번 당했습니다. 그는 이 실패의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의 시선을 눈에 보이는 것에, 세상의 화려함과 편리함 그리고 완벽하게 보이는 환경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머문 곳은 롯이 택한 곳에 비교하면 척박한 환경이었고 살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거라는 믿음. 비록 내 인생이 황폐하고 메말라서 살기에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가 보여주시는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 속에 간섭하시면 그 인생은 달라지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선포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에 그 곳에 많은 샘물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그 복을 채워주나이다”(85:5,6).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 패배의 인생,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 – 하나님의 구원이 그 인생에 임하면 성공적인 인생, 풍족하고 강한 인생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요셉, 다윗, 롯과 다니엘 등의 인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에 거주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교통’, ‘친교’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소망으로 삼고 오직 눈을 하나님께 두고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복이 되었고, 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026
끝까지 믿으라!
우리는 하늘로 솟구치는 믿음으로 살다가 때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왔으며 또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가 믿음의 실패를 했습니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눈을 우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이 보이는 대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자신의 눈을 우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오자 그는 믿음 보다는 자신의 눈을 의지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는 비굴하고 비참한 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가나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뜻에 따라 우리를 두신 자리입니다 – 십일조 생활, 예배, 기도 그리고 섬김의 생활, 교회, 가정, 직장과 사업장 등등. 그런데 그 ‘가나안’에 기근 즉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그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눈에 의지하여 있어야 할 자리에서 떠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민 23:19).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의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마귀는 하나님의 복을 빼앗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로 떨어져 나가도록 우리의 가나안에 기근을 가져다줍니다. 나의 눈으로 보면 머물러 있어야 할 가나안이 한탄과 근심의 장소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가나안이 생명의 장소요,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장소 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으며, 다윗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라를 통해 약속의 씨기 나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라가 바로의 궁궐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바로로 하여금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떠나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려다가 비참한 인생에 빠지고 말았지만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을 향한 그의 약속을 지키시려고 바로에게 재앙은 내려 사라를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잠언 3장 5-7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다 할지라도 가나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는 길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은 그 어떤 인생 기근보다 더 크십니다. 인생 기근 마저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복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섬기는 자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두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2026
내 인생의 황금기!
리더 코칭인 David Dru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제 미래는 더없이 밝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참되며 그 분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저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고 그분이 주시려는 모든 것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황금기
입니다.” 데이빗 드루리가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인생의 황금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과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 사이의 간격 때문에 실망과 좌절의 맛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송이 멘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송이가 손에 닿게 되면 금방 녹아버린 것처럼 겁쟁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마치 패배자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REVEAL Research Project> 가 일천 개가 넘는 교회 조사를 통해 활기가 있는 신앙 혹은 신앙의 황금기를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되는지 조사했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약 11퍼센트의 그리스도인만이 신앙의 황금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수가 약 22억으로 보는데 약 20억의 그리스도인이 무기력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조사 결과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애굽(죄의 노예)으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애굽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37절이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런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툭하면 인생 문제나 장애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갑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땅에 발이 묶여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담대 하라’, ‘두려워 말라,’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 두려워하지 않거나 담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을 먹고 사는 신분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신분입니다. “담대하라!”
2026
복이 될 지라 (3)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의 복으로 삼아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세 번째 영적 비결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3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축복하는 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이요, 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이 자녀들이 그의 복을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아론 대제사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게 하셨습니다 (민 6:23-27). 이런 축복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9).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하는 입으로 살아가면 그런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성도는 ‘축복의 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복을 답지 못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는 마음, 가정 그리고 삶 속에 천국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도는 먼저 사랑하는 삶과 용서하는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임하게 되며 하나님의 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사람이 됩니다. 넷째로, 복의 통로가 되려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선포하시니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7절).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나 편견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지만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내 것으로 삼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복을 자녀들에게 주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 복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복을 내 것으로 믿음으로 선포하는 사람이 그 복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내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복을 믿음으로 내 것으로 삼는 고백의 행함이 바로 제단을 쌓는 것 즉 예배 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4:23). 하나님은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그의 좋은 것들로 주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른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이며, 복의 통로가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된 아브라함처럼 성도라는 정체성을 갖고,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 떠나 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시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입을 갖고 살아가며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이요, 복의 통로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026
복이 될 지라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복의 통로로 만드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복의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려면 우리가 가고 싶은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으로 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선포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성도는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그의 인생 속에 수많은 굴곡들이 있었지만 단 한 차례도 그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그는 복의 통로가 되어 그의 가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왔습니다. 홍해 앞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길이 마치 실패와 멸망의 길로 그들에게 보였지만 실상 그 길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걷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시는 길이 지름길입니다. 가장 확실하며,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인생은 광야 길을 걷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나침반과 같아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항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성도로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복이 되며, 또한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선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온 것처럼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원 속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보다는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이다. 천국의 항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항해해야 한다. 때로는 순풍이고, 때로는 역풍이 불겠지만 아무튼 항해를 해야 한다. 우리는 돛을 올리고 하나님의 뜻ㅇ르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든지 간에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돛을 올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는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26
너는 복이 될 지라(1)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통로로서 사용하시고자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 지라.”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만들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복덩이’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그의 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 – 오래 사는 것, 물질의 부유함, 건강의 복, 덕을 좋아하며 즐기는 복, 제명대로 사는 복 -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천국 기업에 대한 약속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런 복을 받은 사람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의 복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말 합니다. 그래서 벧후 1장 4절은 선포합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찬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복이 되는 삶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이 되려면 이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이 말씀은 부모, 친척 그리고 이웃들과 담을 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습니다. 이는 그곳의 사람들이 우상 숭배 속에 살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상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헛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브라함 역시 그런 세상의 가치관의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되어야 했기에 그런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혼돈과 삶의 혼돈을 동시에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방식과 실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다름으로 인해 갈등과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충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복이 되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복 즉 가짜의 복을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떠나 살아가고 있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으로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떠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복의 통로이다’ 라는 정체성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마치 네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있으면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게 됩니다. 성도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복. 즉 복의 통로’라는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면 세상의 가짜 복들을 구걸하는 영적 거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복으로 인도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2026
흩으셨더라!
본문 말씀은 ‘바벨탑 사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을 흩으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첫째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과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곳에 오직 그들 만이 있는 줄 알았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5절).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바벨탑을 쌓으며 살고 있습니다. 삶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자신만의 인생을 쌓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인생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나님 없이 바벨탑을 쌓고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흩으셨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흩으시니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세우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 속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로,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내고”(4절) 즉 자신들의 영광과 명성을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복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은 자신들의 영광과 높임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그의 심판을 가져오는 무서운 죄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인생을 쌓고자 하는 목적과 동기를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과 나라를 세우는 일 즉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도록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내 이름을 내기 위해” 인생을 쌓아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나의 영광과 높임을 위하여 인생을 쌓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죄입니다. 이런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가져오게 됩니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말았듯이 그 인생을 결코 세워지지 않고 무너지게 됩니다.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높이고자 ‘흩어짐을 면하자’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혼잡하게 만드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교만으로 인생의 바벨탑을 쌓고자 하면 하나님은 그 인생을 혼잡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와 복을 그의 뜻을 위하여, 그의 영광과 나라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찬송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인생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 속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는 복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2026
덮어주는 은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수치와 허물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하여 그만 벌거벗고 자는 수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평을 들었지만 이것은 그가 정말로 죄가 없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노아는 홍수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노아가 그만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게 되자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자는 수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형통해지게 될 때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을 비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자 밧세바의 사건과 인구 계수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갔던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영생의 선물과 천국 기업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되면 육체의 소욕을 좇아 환경에 져서 수치스러운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 부하든지 혹은 가난하든지, 넉넉하든지 혹은 부족하든지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과 소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 그만 육체의 소욕을 좇아가는 수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가 벌거벗는 자는 수치를 보여줄 때 셈과 야벳은 그것을 덮어주었지만 반면에 함을 그것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축복하여 그들과 자손들이 하나님의 복들을 누리게 했지만, 함에게는 저주를 선포함으로 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통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물을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랑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언 10장 12절입니다. “미움을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셈과 야벳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허물과 수치를 덮어주신 것처럼 노아의 허물을 덮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의 되어 주셨고, 야벳을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처럼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품고, 은혜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26
무지개 언약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노아와 가족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았지만 황폐해진 눈앞의 상황으로 인해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비, 구름만 보아도 홍수 심판의 트라우마로 인해 두려움의 포로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의 확증을 위해 선포하신 것이 본문 말씀의 ‘무지개 언약’ 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놀라운 복들을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의 확증 즉 무지개 언약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풍랑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의 의미를 우리를 향한 복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1)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의 은혜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인해 두려움을 갖고 살았단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으로 무지개를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노아를 돌보시겠다고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었고, 원수였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영생을 선물로 주셨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절대로 파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그 어느 것도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거나, 혹은 어떤 조건을 달아서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온전히 그의 은혜 안에서 약속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복들을 의심하거나 혹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지개 언약입니다. 무지개가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복의 확증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복의 확증입니다. (2) 무지개 언약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노아는 방주 밖 눈앞에 펼쳐진 황무함을 보았을 때 그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노아에게 하나님은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홍수 심판이 없을 거라는 확증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아니라 사랑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곳곳에 우리를 향한 사랑의 약속의 말씀들을 증거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붙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다고 약속하십니다. 평안을 주시며, 구한 것을 주시며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크고 놀라운 사랑을 주십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 마음 속에 근심과 두려움을 심어 주지만 하나님은 담대함과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복들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언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입니다.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돌봐 주겠다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