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황금기!

리더 코칭인 David Dru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제 미래는 더없이 밝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참되며 그 분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저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고 그분이 주시려는 모든 것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황금기

입니다.” 데이빗 드루리가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인생의 황금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과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 사이의 간격 때문에 실망과 좌절의 맛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송이 멘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송이가 손에 닿게 되면 금방 녹아버린 것처럼 겁쟁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마치 패배자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REVEAL Research Project> 가 일천 개가 넘는 교회 조사를 통해 활기가 있는 신앙 혹은 신앙의 황금기를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되는지 조사했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약 11퍼센트의 그리스도인만이 신앙의 황금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수가 약 22억으로 보는데 약 20억의 그리스도인이 무기력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조사 결과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애굽(죄의 노예)으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애굽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37절이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런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툭하면 인생 문제나 장애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갑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땅에 발이 묶여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담대 하라’, ‘두려워 말라,’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 두려워하지 않거나 담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을 먹고 사는 신분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신분입니다. “담대하라!”

복이 될 지라 (3)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의 복으로 삼아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세 번째 영적 비결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3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축복하는 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이요, 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이 자녀들이 그의 복을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아론 대제사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게 하셨습니다 (민 6:23-27). 이런 축복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9).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하는 입으로 살아가면 그런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성도는 ‘축복의 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복을 답지 못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는 마음, 가정 그리고 삶 속에 천국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도는 먼저 사랑하는 삶과 용서하는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임하게 되며 하나님의 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사람이 됩니다. 넷째로, 복의 통로가 되려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선포하시니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7절).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나 편견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지만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내 것으로 삼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복을 자녀들에게 주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 복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복을 내 것으로 믿음으로 선포하는 사람이 그 복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내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복을 믿음으로 내 것으로 삼는 고백의 행함이 바로 제단을 쌓는 것 즉 예배 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4:23). 하나님은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그의 좋은 것들로 주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대하고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른 예배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이며, 복의 통로가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된 아브라함처럼 성도라는 정체성을 갖고,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 떠나 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시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입을 갖고 살아가며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이요, 복의 통로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복이 될 지라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복의 통로로 만드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복의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려면 우리가 가고 싶은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으로 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선포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성도는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그의 인생 속에 수많은 굴곡들이 있었지만 단 한 차례도 그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그는 복의 통로가 되어 그의 가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왔습니다. 홍해 앞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길이 마치 실패와 멸망의 길로 그들에게 보였지만 실상 그 길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걷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시는 길이 지름길입니다. 가장 확실하며,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인생은 광야 길을 걷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나침반과 같아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항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성도로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복이 되며, 또한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선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온 것처럼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원 속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보다는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이다. 천국의 항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항해해야 한다. 때로는 순풍이고, 때로는 역풍이 불겠지만 아무튼 항해를 해야 한다. 우리는 돛을 올리고 하나님의 뜻ㅇ르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든지 간에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돛을 올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는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복이 될 지라(1)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통로로서 사용하시고자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 지라.”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만들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복덩이’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그의 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 – 오래 사는 것, 물질의 부유함, 건강의 복, 덕을 좋아하며 즐기는 복, 제명대로 사는 복 -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천국 기업에 대한 약속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런 복을 받은 사람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의 복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말 합니다. 그래서 벧후 1장 4절은 선포합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찬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복이 되는 삶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이 되려면 이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이 말씀은 부모, 친척 그리고 이웃들과 담을 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습니다. 이는 그곳의 사람들이 우상 숭배 속에 살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상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헛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브라함 역시 그런 세상의 가치관의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되어야 했기에 그런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혼돈과 삶의 혼돈을 동시에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방식과 실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다름으로 인해 갈등과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충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복이 되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복 즉 가짜의 복을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떠나 살아가고 있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으로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떠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복의 통로이다’ 라는 정체성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마치 네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있으면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게 됩니다. 성도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복. 즉 복의 통로’라는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면 세상의 가짜 복들을 구걸하는 영적 거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복으로 인도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흩으셨더라!

본문 말씀은 ‘바벨탑 사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을 흩으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첫째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과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곳에 오직 그들 만이 있는 줄 알았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5절).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바벨탑을 쌓으며 살고 있습니다. 삶 속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자신만의 인생을 쌓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인생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나님 없이 바벨탑을 쌓고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흩으셨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흩으시니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세우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 속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로,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내고”(4절) 즉 자신들의 영광과 명성을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복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을 쌓았던 자들은 자신들의 영광과 높임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그의 심판을 가져오는 무서운 죄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인생을 쌓고자 하는 목적과 동기를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과 나라를 세우는 일 즉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도록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내 이름을 내기 위해” 인생을 쌓아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나의 영광과 높임을 위하여 인생을 쌓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죄입니다. 이런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가져오게 됩니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말았듯이 그 인생을 결코 세워지지 않고 무너지게 됩니다.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높이고자 ‘흩어짐을 면하자’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혼잡하게 만드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교만으로 인생의 바벨탑을 쌓고자 하면 하나님은 그 인생을 혼잡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와 복을 그의 뜻을 위하여, 그의 영광과 나라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찬송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인생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 속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는 복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덮어주는 은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수치와 허물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하여 그만 벌거벗고 자는 수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평을 들었지만 이것은 그가 정말로 죄가 없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노아는 홍수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노아가 그만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게 되자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자는 수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형통해지게 될 때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을 비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자 밧세바의 사건과 인구 계수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갔던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영생의 선물과 천국 기업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되면 육체의 소욕을 좇아 환경에 져서 수치스러운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 부하든지 혹은 가난하든지, 넉넉하든지 혹은 부족하든지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과 소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놓쳐 그만 육체의 소욕을 좇아가는 수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가 벌거벗는 자는 수치를 보여줄 때 셈과 야벳은 그것을 덮어주었지만 반면에 함을 그것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축복하여 그들과 자손들이 하나님의 복들을 누리게 했지만, 함에게는 저주를 선포함으로 함과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통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물을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처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랑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언 10장 12절입니다. “미움을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셈과 야벳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허물과 수치를 덮어주신 것처럼 노아의 허물을 덮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의 되어 주셨고, 야벳을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처럼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품고, 은혜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지개 언약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노아와 가족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았지만 황폐해진 눈앞의 상황으로 인해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비, 구름만 보아도 홍수 심판의 트라우마로 인해 두려움의 포로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의 확증을 위해 선포하신 것이 본문 말씀의 ‘무지개 언약’ 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놀라운 복들을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복의 확증 즉 무지개 언약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풍랑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의 의미를 우리를 향한 복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1)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의 은혜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인해 두려움을 갖고 살았단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으로 무지개를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노아를 돌보시겠다고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었고, 원수였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영생을 선물로 주셨으며,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절대로 파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그 어느 것도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거나, 혹은 어떤 조건을 달아서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온전히 그의 은혜 안에서 약속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복들을 의심하거나 혹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지개 언약입니다. 무지개가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복의 확증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복의 확증입니다. (2) 무지개 언약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노아는 방주 밖 눈앞에 펼쳐진 황무함을 보았을 때 그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노아에게 하나님은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홍수 심판이 없을 거라는 확증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의 포로가 아니라 사랑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곳곳에 우리를 향한 사랑의 약속의 말씀들을 증거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붙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다고 약속하십니다. 평안을 주시며, 구한 것을 주시며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크고 놀라운 사랑을 주십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 마음 속에 근심과 두려움을 심어 주지만 하나님은 담대함과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복들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언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입니다.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돌봐 주겠다는 사랑의 증표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다스리시는데 그의 약속의 복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본문 말씀은 한 가지 진리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어느 시점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으로 인해 모든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노아에게 이렇게 복을 선포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노아에게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막길을 가는 것입니다. 수시로 지형이 바꿔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 역시 그러합니다. 그래서 인생 지도보다는 인생 나침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 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노아에게 복을 선포하신 그의 말씀을 통해 또 하나의 진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는 우리가 겪는 고난의 한계까지도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노아가 상실과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선포하셔서 더 풍성한 것들로 그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새로운 장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노아를 다스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지라도 어느 시점에 상실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건강, 물질, 인간 관계, 가정, 직장과 사업장 등등. 성도는 이런 경우에 근심과 낙심의 포로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노아의 인생을 회복시킨 하나님이 우리 인생 역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가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생육하게 하시며, 번성하게 하시며 그리고 땅에 충만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마르지 않습니다. 비록 상실의 자리에 있게 된다 할지라도 그의 약속의 시간 속에서 인생이 회복이 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반드시 보게 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보다 더 평안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홍수 심판 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그들 밖에 없으므로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이런 노아에게 하나님이 선포하십니다.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2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복을 선포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믿음으로 날마다 선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역시 고난에 순종하심으로 만 주의 주, 만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구원의 주인공이 됩니다.  

기다림의 신앙(2)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지 7일 후에 홍수가 터졌으니 노아는 방주 안에서 382일을 보낸 셈입니다. 본문 말씀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시니 노아가 방주로부터 나왔습니다. 노아는 물이 걷힌 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물이 걷힌 지 56일이나 지나서 그는 방주로부터 나왔습니다. 방주 안에 오랫동안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며 힘들었겠습니까?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가보자고 얼마나 자주 성화를 내겠습니까?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방주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의 스케줄을 따라 일하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계획표대로 혹은 우리 시간을 따라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심과 염려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 방식을 좆아갑니다. 세상의 풍속과 관습 그리고 세상 방식과 흐름을 좇아 살아갑니다. 자신을 인생의 주인과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과 불신의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있느냐 혹은 없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노아처럼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자 한다면 그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전에 우리를 그의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연단의 시간을 갖게 하십니다. 연단의 시간은 ‘기다림’ 입니다. 성도는 ‘기다림의 여정’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눈앞의 환경과 상황이 우리를 급한 마음으로 몰아내도 우리 뜻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당장’의 시간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직’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그의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기에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10:23).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이나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인생 기다림의 여정에서 걸어가야 하는 바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인생 속에 많은 바람들이 불어오지만 그 바람대로 살아가지 말고 마땅히 가야 할 방향으로 돛을 달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돛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4,5). 성도는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볼 때까지 불평과 원망으로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게 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노아가 방주 속에 382일 동안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에 두십니다.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에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지 않아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의 신앙(2)

인생 속에는 수많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신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더디 있게 되면 의심과 염려가 믿음을 흔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일년 10일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홍수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이 기쁨과 감격이 있었겠지만 긴 시간 동안 방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여간 고욕이 아니었을 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불평과 원망 가운데 수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그것은 광야 생활 중에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이 그들에게 금방 안겨지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애굽의 문화, 문명, 관습 그리고 신앙 등의 영향을 받고 살았습니다. 순수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어야만 하듯이 그들 역시 믿음의 순수성을 위해 광야라는 용광로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즉 연단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연단의 시간이 ‘기다림’ 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다 보면 구원의 감격과 기쁨, 은혜의 감동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배, 기도 그리고 섬김 등으로 편안한 삶과 육신의 만족을 기대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제 ‘믿음의 싸움’ 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싸움’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기다림은 끝이 반드시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보통 곤욕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 1절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들과 가축을 기억하사.” “기억하사”의 히브리어는 ‘자카르’인데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늘 기억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 대하여 그런 마음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기다람의 신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과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천만 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3:3,4). 기가막힌 상황 속에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선포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신앙’ 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다림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이 찾아오지만 그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을 믿고 그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노아가 비록 방주 안에서 1년 10일을 보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니 바람을 불게 하여 물이 마르게 하셨습니다.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믿음의 여정에는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