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다스리시는데 그의 약속의 복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본문 말씀은 한 가지 진리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어느 시점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으로 인해 모든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노아에게 이렇게 복을 선포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노아에게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막길을 가는 것입니다. 수시로 지형이 바꿔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 역시 그러합니다. 그래서 인생 지도보다는 인생 나침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 만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노아에게 복을 선포하신 그의 말씀을 통해 또 하나의 진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는 우리가 겪는 고난의 한계까지도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노아가 상실과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선포하셔서 더 풍성한 것들로 그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새로운 장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노아를 다스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우리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지라도 어느 시점에 상실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건강, 물질, 인간 관계, 가정, 직장과 사업장 등등. 성도는 이런 경우에 근심과 낙심의 포로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노아의 인생을 회복시킨 하나님이 우리 인생 역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가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생육하게 하시며, 번성하게 하시며 그리고 땅에 충만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마르지 않습니다. 비록 상실의 자리에 있게 된다 할지라도 그의 약속의 시간 속에서 인생이 회복이 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반드시 보게 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보다 더 평안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홍수 심판 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그들 밖에 없으므로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이런 노아에게 하나님이 선포하십니다.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2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복을 선포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믿음으로 날마다 선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역시 고난에 순종하심으로 만 주의 주, 만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구원의 주인공이 됩니다.  

기다림의 신앙(2)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지 7일 후에 홍수가 터졌으니 노아는 방주 안에서 382일을 보낸 셈입니다. 본문 말씀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시니 노아가 방주로부터 나왔습니다. 노아는 물이 걷힌 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물이 걷힌 지 56일이나 지나서 그는 방주로부터 나왔습니다. 방주 안에 오랫동안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며 힘들었겠습니까?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가보자고 얼마나 자주 성화를 내겠습니까?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방주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의 스케줄을 따라 일하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계획표대로 혹은 우리 시간을 따라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심과 염려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 방식을 좆아갑니다. 세상의 풍속과 관습 그리고 세상 방식과 흐름을 좇아 살아갑니다. 자신을 인생의 주인과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과 불신의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있느냐 혹은 없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노아처럼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자 한다면 그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전에 우리를 그의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연단의 시간을 갖게 하십니다. 연단의 시간은 ‘기다림’ 입니다. 성도는 ‘기다림의 여정’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눈앞의 환경과 상황이 우리를 급한 마음으로 몰아내도 우리 뜻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당장’의 시간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직’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그의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기에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10:23).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이나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인생 기다림의 여정에서 걸어가야 하는 바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인생 속에 많은 바람들이 불어오지만 그 바람대로 살아가지 말고 마땅히 가야 할 방향으로 돛을 달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돛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4,5). 성도는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볼 때까지 불평과 원망으로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게 되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노아가 방주 속에 382일 동안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에 두십니다. ‘기다림의 시간과 장소’에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지 않아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다림의 신앙(2)

인생 속에는 수많은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신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더디 있게 되면 의심과 염려가 믿음을 흔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일년 10일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홍수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이 기쁨과 감격이 있었겠지만 긴 시간 동안 방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여간 고욕이 아니었을 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불평과 원망 가운데 수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그것은 광야 생활 중에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이 그들에게 금방 안겨지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애굽의 문화, 문명, 관습 그리고 신앙 등의 영향을 받고 살았습니다. 순수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어야만 하듯이 그들 역시 믿음의 순수성을 위해 광야라는 용광로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즉 연단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연단의 시간이 ‘기다림’ 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다 보면 구원의 감격과 기쁨, 은혜의 감동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배, 기도 그리고 섬김 등으로 편안한 삶과 육신의 만족을 기대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제 ‘믿음의 싸움’ 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싸움’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기다림은 끝이 반드시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보통 곤욕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 1절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들과 가축을 기억하사.” “기억하사”의 히브리어는 ‘자카르’인데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늘 기억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 대하여 그런 마음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기다람의 신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과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천만 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3:3,4). 기가막힌 상황 속에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선포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신앙’ 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다림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이 찾아오지만 그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을 믿고 그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노아가 비록 방주 안에서 1년 10일을 보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니 바람을 불게 하여 물이 마르게 하셨습니다.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믿음의 여정에는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라!

   사람이 넘어질 때는 큰 바위 때문이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합니다. 작으니까 가볍게 여길 수도 있고 아니면 작으니까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반면에 큰 바위는 눈에 금방 띄기 때문에 사전에 조심을 하게 되어 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경고의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15).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5).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보다 더욱 해롭게 하느니라” (전 10:1). 어느 개그맨이 이런 멘트를 쳐서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그 까이 것 대충” 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사소한 것 혹은 작은 것을 가볍게 여겨서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뭐 별일 있겠어?’, ‘그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성경이 경고한 대로 신앙은 사소한 것에 넘어지게 됩니다. ‘한 두 번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별 일 있겠어’, ‘기도 좀 열심히 안 한다고 큰 일이 나겠어’, ‘대충 교회 생활을 한다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야’ 등등입니다. 알코올 중독 혹은 도박 중독 등에 빠진 사람들의 시작은 극히 작은 시작입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혹은 재미 삼아 조금만 해 보지 뭐 식으로 시작을 했다가 결국 인생을 망치게 하는 중독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지혜로운 신앙인은 작은 것의 위험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배를 평소에 무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형편에 빠지게 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일 성수’를 그렇게 권면을 해도 세상 일에 흠뻑 빠져서 살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겨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를 귀하게 여기지 않다가 막상 할 수 없게 되어 봉사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선포한 대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소한 신앙의 게으름과 방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

하나님의 구원(2)

하나님이 노아를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를 짓게 했습니다. 14절입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야 방주를 만들되.” 노아는 하나님을 위해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 심판과 피할 길을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족들 역시 다른 사람들이 멸망당했을 때 함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에게 지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며 원수였던 우리를 사랑하시니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갖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의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을 갖고 계셨지만 모든 소경들이 눈을 뜬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디메오에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 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총체적인 구원(holistic salvation) 입니다.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우리 영, 혼 그리고 몸의 모든 것에 대한 치유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자녀에게 약속된 신령한 복들과 이 땅 위의 복들을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분량에게 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피난처, 상급 그리고 공급자가 되어 주셔서 그의 풍성함 속에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구원울 받고자 한다면 노아처럼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고자 십일조 신앙을 명령하십니다(말 3:10).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 속에 살도록 기도를 명령하십니다(마 7:7), 감사하라는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인생의 산이 옮기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시 50:23).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그를 만나는 복을 주십니다(잠 8:17). 하늘에 상급이 쌓이도록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벧전 4:10).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용사의 인생, 명성을 떨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노아는 질시와 조롱 속에서 방주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은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노아에 대해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노아는 …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라고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마귀는 세상을 이용하여 우리를 조롱하며 멸시를 받게 합니다. 심지어 신앙인을 통해서도 공격을 받게 됩니다. 마음 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믿음을 배우세요!

Havie Conn신학 박사는 신학교 신입생들에게 “좋은 목사가 되려 하지 말고 좋은 학생이 되세요” 라고 설교를 했다 합니다. 배움의 자리에서 배우는 데에 열심을 내야 좋은 주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배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 완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단언컨데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순례길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믿는 믿음’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의 길에서 이탈하여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은 순례길에서 겪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로 인하여 믿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믿음은 단번에 혹은 한꺼번에 갖지 못합니다. 순례길에서 인생의 여러 장애물들과 문제들과의 씨름에서 우리들보다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선포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좋은 학생은 열심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배우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배운 믿음을 또한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훌륭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머리에서 나온 것은 상대방의 머리까지 들어가고, 가슴에서 나온 것은 상대방의 가슴까지 들어가고, 다리에서 나온 것은 다리까지 들어간다.” 삶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 속에 배우는 믿음을 머리 속에 두지 말고, 혹은 가슴 속에 품지만 말고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믿음이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여 그 믿음을 배웁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믿음에 취하여 마땅히 본받고 배워야 할 믿음을 배우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바른 믿음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배우세요!

하나님의 구원(1)

모든 사람이 부패하여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아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사람을 심판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이 세상을 향한 그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노아를 통해 이 땅 위에 임했습니다.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이 노아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져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포악함의 포로가 되어 온갖 악들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셋의 후손들까지 세상의 화려함과 풍성함에 마음이 팔려 가인의 후손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이 세상 방식과 자랑을 좇아 살아도 망하기는 커녕 용사와 같은 인생 그리고 명성을 떨치는 인생을 살아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말씀을 무시하며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잘 나가는 인생을 살아간 듯했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던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 속에 홍수 심판에도 죽지 않고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두 번째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를 구원하고자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즉 피난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입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피난처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피난처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유일한 길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은혜와 신령한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노나 키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 안에서 자라게 하는 구원의 방주, 교회는 사람의 힘과 지식으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조종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으로 교회는 움직여져야 합니다. 그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들이 맺어지게 됩니다. 죽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생명의 인생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밎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면 그와 그의 가족들 역시 모두 홍수 심판으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 안에 들여진 짐승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난처이신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나의 주와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까?

셋의 경건한 후손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 가인의 후손들을 배우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네피림에 이끌려서 용사와 같은 자녀들을 낳으니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을 좇아가는 것이 행복으로 보였지만 실상 하나님의 눈에는 무서운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7절). 하나님께서 빠져버린 세상의 화려함과 명성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용사, 명예의 용사 그리고 세상의 화려함의 용사를 좇아가고 그것들이 행복의 비결로 여기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는 법죄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까? 그들의 ‘영적 간음’ 때문 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우상들을 좇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그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무언가를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며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었습니다. 8절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홍수 심판으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남겨두어 그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를 통해 그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좇아갔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을 했습니다. 또한 노아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완전한 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작품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삶 속에서 그를 드러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단 한 사람의 지진’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졌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셔서 그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본문 말씀은 한 사람을 통해 인류 문화와 문명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을 통해 난 후손들이 세상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거주할 집(가인-성)이 만들어져서 안전을 보장했고, 먹을 것이 보장되었으며(야발-목축업),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음악(유발-수금과 퉁소)을 제공했으며, 편리한 삶을 위해 도구(두발가인-금속 공예)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그 후손이 세운 문화와 문명을 자신들의 만족과 욕망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화려하고 멋진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지만 하나님을 배제한 사람의 만족과 욕구를 위한 문화요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셋입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때부터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그들의 정체성(“에노스”:‘죽어야 할 사람’)을 깨닫고 구원자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셋과 그의 후손들이 그들이 부서져 죽게 된다는 영적 진리를 께닫고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아브라함이 나왔고, 아브라함을 통해 다윗이 나왔으며 그리고 다윗을 통해 예수가 나왔습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죄로 죽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셋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인의 후손처럼 육신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세상을 벗삼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멋진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지만 그들의 인생 끝은 멸망으로 끝났습니다. 반면에 멋진 문화와 문명을 만들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부서지고 깨져서 죽는 존재임을 깨닫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갔던 셋의 후손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떨치는 있습니까? ‘단 하나의 지진’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입니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의 후손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흠향되는 예배

본문 말씀은 ‘최초의 살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살인은 예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예배)을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흠향 되었지만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최초 살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흠향 되지 않은 이유가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7절).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가인이 바르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바른 제사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 4절이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바른 제사는 믿음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어떤 믿음이 들어 있어야 합니까? 첫째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배 초점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의 구원에 감사하며 그리고 그의 자녀로 불러 주신 소명을 이루며 살겠다는 결단을 선포해야 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믿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지만, 반면에 가인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냥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잘못된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신 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예배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예배를 받으시게 합당한 분으로 믿는 믿음이 예배 속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배 속에 성령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의 성령 안에’의 의미입니다. 즉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취향과 선호 즉 우리가 원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성령의 다스림 속에 드려져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아십니다. 우리들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회개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