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3)

하나님의 위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임합니다. 3절은 선포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여기에서 “광야’나 “사막” 은 우리 마음, 우리 인생을 의미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 그리고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아갈 때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 속으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4절입니다.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골짜기”는 자기 스스로 기가 죽어 있거나 자신을 비하시키는 ‘열등감’의 마음 혹은 인생을 의미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막아 버립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 명의 사람은 열등감을 품게 되었고, 그 열등감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옮겨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도록 길(마음/인생)을 닦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열등감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돋우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벧전2:9-10). 성도는 내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겸손과 정직함과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열등감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심령/인생을 닦아ㅑ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는 겸손한 심령과 삶 속에 임하게 됩니다 4절입니다.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에 평지가 될 것이요.”. 여기에서 “산”과 “언덕”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각자 마음 속에 있는 ‘교만의 산’과 ‘교만의 언덕’을 깎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으로 인해 죄를 범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자 했던 자들도 교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영적 눈과 귀를 닫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기 보다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을 두게 됩니다. 결국 성령의 근심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을 막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삶 속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2)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 체하시지 않습니다. 어려움과 아픔 등에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기분이 들어 장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보통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분노와 중독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성도는 세상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위로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의 용서하심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2절).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유가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이 없었던 그들에게 죄 사함의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 권세, 명예 그리고 세상 쾌락 등을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재능과 탁월함으로 인해 교만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등불이요 빛인데 그 말씀이 자신의 수치를 보여주면 가차없이 그 말씀을 꺼 버리고 자신이 생각과 고집으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 숭배를 징계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상 숭배를 통해 원수 마귀를 우리 인생을 도둑질하며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를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는 잠시 잠깐의 징계입니다. 그리고 그의 징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에게 오면 하나님은 징계를 멈추시고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하나님의 용서하심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심령 속에 채워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그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로 들어 오게 됩니다. 나의 우상을 던져버리고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1)

<하나님의 위로(1)> 한때 ‘웰빙’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는데 오늘날은 ‘힐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웰빙’은 몸에 관한 관심이라면 ‘힐링’은 마음에 관한 관심입니다. 힐링 음악, 힐링 미술, 힐링 음료, 힐링 마사지, 힐링 삼림욕 등등 마음의 안정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힐링은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산을 정상이 있지만 광야는 길이 없습니다. 바람 한번 불면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광야길에서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필요로 합니다. 가야 할 인생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우리 인생은 광야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수시로 변합니다.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한다면 영적 나침반이 되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마실 물을 공급받고, 쉴 만한 곳에 머물게 되며, 불과 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인생의 나침반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세상 소리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낙심과 절망의 포로로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무언가를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인생의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고 멸망의 길로 끌고 갑니다. 갈증과 불만족, 근심과 절망 그리고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자연스럽게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생을 버티면서 무언 가에 끌려 다니는 포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우리들이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성도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감사가 가져오는 기적

감사는 그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해 줍니다. 환경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전도 여행을 가셨을 때 열 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고 있었을 때 나병이 깨끗이 나음을 입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를 한 사마리아인에게 영혼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질병 치유에 대한 감사가 영혼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된 겁니다. 인생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와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심령 속에 생명의 생수가 흐르도록 해 주십니다. 담대함과 평안을 주십니다.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게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손길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예수님께로 와서 그를 낫게해 주신 구원의 손길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가 영혼 구원의 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한나늘 기도를 통해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세움을 입게 하셨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서원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더 멀어집니다. 주님께로 받은 바 된 그것으로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또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감사에 눈이 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감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감사가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감사, 직장과 사업장을 주신 감사, 호흡하게 하시는 감사, 자녀에 대한 감사, 일용한 양식과 건강을 주시는 감사, 친구와 이웃을 주신 감사, 맘껏 예배하게 해 주시는 감사 등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감사를 드리되 진실한 감사, 믿음의 감사 그리고 사랑이 담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기쁨이 있는 인생

<기쁨이 있는 인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인생은 마냥 기뻐할 수만 없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한 고비를 만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거 말씀하시니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기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채워지게 됩니다. 과거에도 도와주셨으니 지금도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아픔과 고통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들이 기쁨과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주님의 평안이 우리 안에 깃들게 됩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머물게 됩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삼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5절).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마구잡이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고 주어진 인생을 힘껏 살아가야 합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긍정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가시를 통해 오히려 그의 자녀로 하여금 성공적인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바라봄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겉으로 고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 고통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 문제’를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지혜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기쁨이 회복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의 가치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성도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낮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본문 말씀은 성도의 값어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4절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신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전능하시며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신분입니다. 요일 4장 10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선포합니다. 롬 5장 8절은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모습으로는 ‘은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심령 속에 이 은혜가 흘러 넘쳐야 합니다. 이 은혜가 마르게 되면 금세 우리 심령 안에 불안과 근심, 불평과 원망이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마치 홀로 버려진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덮어주고 있습니다. 비바람이 불어 쳐도 태양은 가리워져 있을 뿐이지 여전히 태양은 떠 있는 것처럼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이요,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삼고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4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신분일 뿐만 아니라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신분입니다.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해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 모습은 성령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며, 선포된 말씀을 참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5절). 성령께서 심령 안에서 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며, 이 세상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마귀에게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 믿는 자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누가 믿는 사람입니까? (2)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하는 근거로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믿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성령의 부으심’, ‘성령을 받음’ 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우리 삶 속에서 믿는 사람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겉모습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성령의 다스림 속에서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의 열매는 우리 스스로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지요, 예수님을 나무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나무에 달려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성도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달라붙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도록 권능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두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세력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세력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육체의 소욕을 좇는 세력은 죄의 본성이요, 성령의 소욕을 좇는 세력은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육체의 소욕을 능히 이길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거룩한 삶을 저절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누가 믿는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서 다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전도의 열매들을 안디옥 교회에서 와서 보고를 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일부 사람들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하자 안디옥 교회 안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이 구원의 진리에 대한 혼동 때문에 마음이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단들의 열심은 우리의 열심보다 훨씬 뛰어 납니다.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열심은 우리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서 ‘이단’, ‘사이비’ 혹은 ‘미신’ 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릅니까?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 큰 믿음과 적은 믿음, 산 믿음과 죽은 믿음, 참 믿음과 가짜 믿음 등등.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난 ‘믿음의 사람’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믿음,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되어야 내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믿는 사람입니까? 올바른 믿음의 내용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입니다(고후 10:18).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정말로 그렇습니까?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을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을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질책을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 뜻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선호대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겉모습만 믿는 사람이지 실상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과 처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배, 기도, 봉사 그리고 청지기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내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이전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이 사주, 팔자, 운명 등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은 우리의 삶과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창조하셨고,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을 주관하십니다. 사주나 팔자는 인간이 특정 시간, 날짜에 따라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특별하게 지으시고, 인생의 길을 친히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사람의 주권은 어떤 별자리나 태어난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주나 점과 같은 것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명령하십니다. 사주와 운명을 믿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힘, 즉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에 기대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신뢰와 사랑을 방해하게 됩니다. 셋쩨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주와 팔자는 우리의 인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운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장 10-11절이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점치는 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하는 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 용납하지 말라.”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그 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과 인도하심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도는 언제나 이런 하나님을 굳건히 믿어야 합니다.  

믿음과 십자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삶을 위험과 희생의 삶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한 삶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위험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판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빼 내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믿음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맞게 행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게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규칙들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겉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함이지 그를 괴롭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삭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재확인하게 되는 은혜와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는 삶이 겉으로는 위험과 희생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자기 규칙을 따르는 삶) 잃을 것이요(멸망할 것이요) …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예수님의 규칙을 따르는 삶) 구원하리라(영원히 살리라).” 가짜 복음은 ‘나의 안전’, ‘내 인생의 편안함’, ‘내가 존중받는 것’, ‘풍족한 삶’ 등등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앙은 ‘우상 숭배’입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의 저주로부터 벗어납니다. 영혼과 육신이 치유를 받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것들 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즉 내 자랑, 내 욕심, 내 중심 즉 육신의 요구를 좇아가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죽을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성도로서 부르신 부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