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기도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억울하다 싶으면 기도해라. 기도하지 않으면 얻을 열매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며,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상 누군가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혹은 ‘죄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을 기도를 하지 않으면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해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해 수확은 아예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져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를 갖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성령의 충만 속에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며, 귀신들린 자들을 구원해 주시며 또한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실 수 있었나요?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밤 늦도록 그리고 새벽 미명에 그는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듯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는 통로이며 또한 그릇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과의 싸움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결국 기도의 손을 올리느냐 혹은 올리지 않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났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승패는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의 분량을 늘려야 합니다. 기도의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인생 승리가 커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도를 할 때 영적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통로를 통해 하루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새 힘을 제공해 주십니다. 바른 예배, 바른 섬김 그리고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에 예배의 감격과 기쁨이 희미해지고 있다면, 거룩한 섬김에 대한 게으름과 불평이 있다면 삶이 팍팍하고 답답하다면 우선 기도의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분명히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불평과 원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와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은 생각과 이성을 뛰어넘습니다

아니 생각과 이성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치유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 인생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일어서서 걷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기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9절이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에게 있는 믿음을 발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그 말씀에 따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살았던 헬라인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구원을 받아 영생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고니온 역시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할 때에 일어납니다. 에스더가 3일 금식을 했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도 후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죽으면 죽으리라”의 행함으로 아하수에로 왕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게 되자 범람하던 요단강물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과연 그럴까?’ 라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 멈추지 말고 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그리고 심령 속에 나타나게 되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신의 병만이 병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도 병입니다. 인생의 상처도 병입니다. 이 병들이 깊어지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움과 분노의 포로가 되어 더 큰 상처를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요,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 속에 ‘와우!’ 라는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최고의 삶을 살고자 하십니까?

   최선의 오늘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지 깨닫는 것입니다. 시편 8편 5절은 “그를(사람)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존귀”는 ‘은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도와주며 좋은 것들을 대가 없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로 주고자 하십니다. 그의 선하심과 긍휼 가운데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모함 속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줍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우리가 대단하거나 뭔가 특별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속에 그의 영화와 존귀를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신분의 혜택을 누리는데 영적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좋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 밖에 일이 수월하게 풀어집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팽개치고 나의 일을 도와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손길입니다. 요셉이 기가 막힌 상황 속에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은혜의 손길들을 입었습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니 환관장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최고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한다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오직 그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은혜’.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세상의 삶 속에서 수많은 말들과 소리들을 듣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어느 말과 소리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본문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딤후 3장 15절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입니다(롬 10:17).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충만한 기쁨을 안겨다 줍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52절) 하게 되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죄로부터 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은 ‘기쁨’을 잃고 말았습니다. 죄는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늘 목마르게 만듭니다. 세상 문화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이 될 때 마음과 삶이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말씀을 품으면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온유함과 기쁨, 절제와 인내, 화평과 충성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소망이 회복되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위한 빛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손길에 잡힌 선한 일꾼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생생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늘 성령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만들어 내신 역사의 기록입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고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을 주도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한 일꾼들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를 세워 가고 계십니다. 바울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역사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갔듯이 오늘날 우리들도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야 하는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 말씀 4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의 빛”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비방과 박해를 받아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방의 빛”으로서 성령께서 맡겨 주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 순종을 하게 될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는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붙들고 살아갈 때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듯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우리 역시 사명자로서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방인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빛은 본래 ‘이방인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의 빛’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믿어 그를 우리 삶 속에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어 나는 죽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빛”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빛입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구원을 위한 빛’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영혼의 안전을 지켜야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시조 중에 <탄로가>가 있었습니다.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그 시조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늙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모든 피조물은 늙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국에서 바지를 하나 사려고 시장 가게에 갔습니다. 허리 사이즈를 묻던 주인 여자가 두 팔을 벌려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더니 “할아버지 36”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목사님은 순간 기분이 상했습니다. ‘아니 굳이 할아버지라고 부를 필요가 있나? 아저씨라는 말도 있고, 이왕이며 기분 좋게 ‘오빠 36’ 라고 불러주면 좋을텐데.’ 하지만 자신이 할아버지 나이가 된 것이 사실이니 호칭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언제부터 인가  나이드신 분을 호칭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 역시 ‘할아버지’ 호칭을 듣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나 역시 할아버지가 되는 나이 때문에 그 호칭을 부르고 싶지 않게 된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늙음을 인정하기 싫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젊고자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늙어지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부고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을 애쓰기 보다는 영원한 나라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들 두려워하라(마 10:28).” <탄로가>의 시조처럼 늙음은 지름길로 우리를 찾아오니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구주로서 믿고 그와 날마다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소리를 들어도 영혼은 ‘오빠’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로 받은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들 즉 물질, 권세 그리고 명예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좇아 갑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설령 세상에서 온갖 화려함과 풍족한 것들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 인생의 끝이 영원한 멸망이라면 그 인생은 절대로 성공적인 인생이 아니라 실패의 인생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한 후에 그 결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약속된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종교 지도자들 중에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약속된 자들이라고 예언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지자들을 통해 구주가 되심을 예언되었고, 그 예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그가 구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심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었던 죄인이었습니다(롬 3:23; 엡 2:3). 인간은 죄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밖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영원한 멸망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인간은 죄인이 되는 바람에 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 육신의 요구에 끌려 살아야만 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염려, 근심, 불평, 원망 그리고 두려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인으로서 인생의 결말은 영원한 불 못에서 영원한 고통 속에 살아야만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죄인들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죄로부터 건져내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러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로부터 건짐을 받고자 한다면 그 죄인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명을 드려서 우리의 죄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주와 구주로서 믿을 때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고후 5:18,1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성도의 사명입니다.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신앙!

오늘날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가 되면서 가치관들 역시 빠르게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옳다고 여겨진 것들이 지금은 그르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계속 맞는 것도 틀리다고 주장을 하면 진짜로 진짜가 가짜가 되며, 가짜가 진짜로 변해버립니다. 이런 안타까움이 신앙세계 속에서도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이 변했으니 교회도 변해야 된다’, ‘내 신앙이니 간섭하지 말라’, ‘지금의 예배 구조는 이전의 삶에는 맞겠지만 지금의 삶에는 맞지 않다’, ‘십일조 등 헌금 생활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해하신다’ 등등 전통적인 신앙 생활이 마치 잘못된 것처럼 여기면서 오늘날의 상황에 맞춰서 바꾸어져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물론 교회가 한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지금의 상황을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혹은 신앙 생활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 생활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교회는 믿음의 어머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며 그리고 성도의 신앙을 길러주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에 두는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교회가 되는 것이 교회 본연의 모습이며, 또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하는 신앙 생활, 복음을 전하는 신앙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또한 순종하는 신앙 생활 그리고 신앙을 키워 나가는 신앙 생활은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앙 생활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종의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때로는 좁고, 불편하며 그리고 내 입장에서 보면 손해보는 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향 끝에 하나님의 약속의 복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자리요 또한 영원한 복의 자리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순종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사울과 다윗(2)

본문 말씀 속의 사울과 다윗을 통해 인생의 끝마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창대헸지만 그의 끝은 실패였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나중에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을 굳건하게 잘 마쳤습니다. 다윗은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1)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사울 왕이 그를 죽이고자 추격했을 때 다윗은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기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이기에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삼상 24:6).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면 더 이상 도망자의 삶을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더 이상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먼저 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다윗은 회개를 즉각적으로 행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기 위해 그를 간접적으로 죽였습니다.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다윗은 밤 늦도록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를 하며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꾸지람에 변명하기에 급급하며, 남탓으로 돌렸지만 다윗은 즉시로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마음이 완악하게 굳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살아가면 결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가 마땅히 달려가야 할 길을 달려가게 됩니다. (3)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장막 안에 있는 것이 죄송하게 생각되어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 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 …”(대상 22:14). 여기에서 “환난 중에”의 의미는 ‘극심한 열심으로’ 입니다. 다윗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금 십만 달란트”는 지금으로 매일 일 만불씩 2,000년을 드려도 채워지지 않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엄청난 것들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다윗은 정직함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드렸습니다.

거룩한 아픔

사람은 누구든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내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삶, 나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 그리고 이 세상의 무언가를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삶,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지혜와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과 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결단코 우리는 우리 중심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겠다는 결단,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구주로 받아드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나비가 예쁜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려면 나무에 고치를 틀고 번데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치 안이 편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절대로 예쁜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꽃, 저 꽃을 오가며 꽃들에게 꽃가루를 전달해 주어 열매를 맺게 해 주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나의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갈등과 아픔이 따르지만 그 아픔은 거룩한 아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