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교회와 세상 가치관
세상이 참으로 빠르게 변화가 되면서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섭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삶의 풍속도 엄청나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풍속을 보면 이전에는 혼전 임신을 쉬쉬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동거와 출산이 먼저 이루어지고 결혼식을 치룹니다. 혼전 임신이 오히려 축하를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결혼관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런 변화가 신앙 생활 안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보다는 사람 중심이 더 우선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신다’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필요가 있는가? ‘십일조는 율법적 명령이니 십일조를 굳이 안 해도 돼’, ‘주일 성수나 새벽 기도는 이 시대에 맞는 걸까?’ 등등. 이렇듯 신앙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론과 주장이 초신자나 신앙이 얇은 사람에게 신앙 성장의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교회 지도자나 신학자들이 신앙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많은 신앙인들이 혼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또한 성경 중심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며,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교회를 통해 신앙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직장도, 학교도 아니며, 사교장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며, 천국의 훈련장이며 또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열릴 연회장입니다. 예배는 성도에게 있어서 특권이지 아름다운 의무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받아 세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움을 입는 것이 예배입니다. 헌금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오직 바른 예배를 통하여 성도는 성도가 되게 됩니다.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서 드려져야 합니다. 사람 중심의 신앙 생활은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025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만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뛰어야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한때 바울은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은 실상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다메석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은 어떤 삶의 모습이었습니까? (1)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후 그의 삶 속에서 항상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야만 신앙 생활이 천국이 됩니다. 신앙을 억지로 하게 되면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온통 예수님만 바라보며, 삶 속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어도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무늬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안팎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디딤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회심을 의심했지만 그런 바울을 도와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성도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같은 생각과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 무슨 일이든지 겸손함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세워주셨듯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디딤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며, 위로하며, 사랑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세워주는 삶을 평생 살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2025
나의 가치!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게 많은 사람들에게 K 드라마의 우수성을 알린 <폭삭 속았수다> 드라마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에게 딸이 엄마의 인생이 어떻는가에 물었을 때 할머니가 “하루 하루가 숨이 차는 인생” 이었다고 말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소풍이었소, 아니면 불행이었소?’ 라고 딸이 묻자 할머니가 대답을 합니다. ‘너희들을 낳아 평생 너희들을 보고 살았으니 소풍이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숨이 차도록 인생살이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생을 소풍으로 여긴 것은 자녀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차지하는 자리는 대단합니다. 어쩌면 한 가정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녀’입니다. 자녀 때문에 웃고, 울며 또한 행복해하며 불행 해합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녀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며, 가장 관심과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녀 때문에 ‘인생은 소풍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극한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7-38).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느끼거나 확신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함을 가져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하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확신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능히 구원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2025
사울아, 사울아!
<사울아, 사울아!> 만남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좋은 만남은 인생 행복의 밑거름이지만 나쁜 만남은 인생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 입니다. ‘몸짓’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의미가 있는 인생 ‘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한 인생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 입니다. 바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만남이 ‘예수님과 바울’의 만남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당시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유럽에 들어간 복음이 미국에, 미국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듯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진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을 통해서입니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바울이 다메석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꽃’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꽃’의 인생 즉 의미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을 통해 누군가가 구원을 받고, 내 가정, 내 직장, 내 생업터, 내 교회 그리고 지역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영광스러운 향기를 드러내는 ‘꽃’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 속에 이 만남의 사건을 깨닫게 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그의 종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 속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였고, 그의 약속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천국 시민이요, 성도요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그의 자녀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꽃’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꽃’으로서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꽃이 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우리 역시 하나님의 꽃으로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꽃으로서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우리 몫입니다.
2025
현재가 미래입니다!
줄임말처럼 보이지만 표준말이 있는데 그 단어는 <겉볼안> 입니다. 겉을 보면 가히 안까지 짐작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들이 있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맛이 좋다”, “겉보기가 좋으면 속도 좋다”, “잘 차려 입은 거지가 잘 얻어먹는다” 등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외모에 깊은 관심과 정성을 쏟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말은 옛날 같으면 맞는 말이 되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뛰어난 화장술과 성형 수술이 사람의 외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20년 전 외모보다 지금의 얼굴이 더 젊은 모습이 갖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화장술이 과거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게다가 성형수술까지는 아니어도 피부 관리와 간편한 시술이 이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사람의 겉 모습이 지금이 오히려 과거의 모습보다 훨씬 더 젊게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얼굴이 그 사람의 심상(마음의 얼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 됨됨이가 그 사람 얼굴에 반영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고후 4:16). 성도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우리들이 사는 동안 사람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가장 두렵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심판자는 그 누구도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내게 하실까?’에 대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듣는 말씀이 어떤 영원한 인생을 살게 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2025
전도와 구원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구하실 때 다양한 ‘전도’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나의 전도 한 마디가 한 영혼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꾼을 낳게 합니다. 천국의 VIP는 전도자입니다. 세상 자랑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전도의 열매는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합니다. 본문 말씀 속의 빌립을 통해 전도의 열매가 어떻게 맺어지게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전도의 열매는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인기 스타로 그의 인생을 즐길 수 있었지만 성령께서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을 때 온전히 순종을 했습니다. 그를 통해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관리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의 최대 덕목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은 모두 징계 내지는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욕구와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성령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순종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끌며, 그 한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전도의 열매는 우리 입을 통해 맺게 됩니다. 빌립은 국고 관리인에게 입을 열어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업이 어찌 들으리요.”전도의 시작은 입입니다. 전도의 열매는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전하며 됩니다. 신앙 생활의 기쁨을, 내가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으로 말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천국을 증거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 교회를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전도는 우리가 입을 열어야 열매가 맺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전도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빌립이 성령에 순종하여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듯이 우리 역시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입에서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기도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서는 날 전도의 열매들로 인하여 천국의 VIP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그리고 승리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2025
성령을 받는지라!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그들이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서 영접을 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그 까닭이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니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두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게 됩니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성령 세례’ 혹은 ‘성령 충만’ 혹은 ‘성령의 부어주심’ 혹은 ‘성령 받음’ 입니다.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 경험을 ‘성령 충만’, ‘성령의 임하심’, ‘성령 세례’, ‘성령을 받음’ 등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이 믿는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은사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고전 12장;롬 12장). 뿐만 아니라 성령의 계속적인 다스림을 받게 되면(내주하시는 성령)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게 됩니다(갈 5장). 성도는 성령을 받아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거듭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받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령의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성도들이 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나자 성령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또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 권속들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10:44).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신 능력으로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025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 고 하면 더 하려고 기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해 많은 것들을 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따른 명령은 613개입니다. 해야 할 것은 248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365개입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라는 명령보다 더 많습니다. 우리에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한 제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안전과 복을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삶을 위해 ‘하자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다스리는 능력과 지혜를 또한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물 간의 차이점들 중의 하나는 사람은 삶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판단을 내리지 어떤 기준이 있어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삶의 기준을 갖고 그 기준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했으니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뿐만 아니라 양심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에 근거하여 살아갈 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바람에 양심을 버리고 살아갑니다. 그 바람에 스스로 사람 됨을 포기하고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우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금지된 것을 피하는 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고집과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음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하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의 통로입니다. 단지 그 복의 통로가 좁을 뿐입니다. 하지만 좁더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사랑해야 합니다. 탐욕을 버리라고 하시니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불평 말라 하시니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 말라’하면 안 해야 합니다.
2025
복음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생을 치유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든 인생을 치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절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 절망을 치유하게 하는 약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절망은 치유됩니다. 12년동안 소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38년동안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치유를 받아 절망의 병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또한 복음은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잠언 기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선포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위협 때문에 억울한 마음으로 동굴 속에 자기를 갇혀 두었지만 그는 결국 이런 선포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 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시 57:7). 다윗은 우울한 감정과 상황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갔습니다. 복음의 포로로 살아가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자 그들에게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존 파이퍼 신학자는 “전도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어 마음의 병을 치유하게 합니다. 또한 복음은 육신의 병을 치유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천국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많은 중풍병자들이 그리고 못 걷는 사람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7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치유를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능히 치유하고도 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영혼의 병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절망의 병을 치유합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육신의 병을 치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의 영광과 구원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빌립이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듣고 그들의 믿고.”
2025
신앙은 행동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운명이 바꾸어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삶을 살아가라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후에 어떤 사람이 자신도 독립 운동가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독립 운동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불 속에서 날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백날 이불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생각을 바꾼다고 삶이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학자는 이렇게 말 합니다. ‘생각만 바꾸지 말고 바꾼 생각대로 행동을 하라.’ 부자가 되려면 ‘나는 부자야’ 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부자가 된 것처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뛰어난 가르침은 ‘산상수훈’ 입니다. 주옥 같은 수많은 교훈을 주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 24-27).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혹은 마음 속에 품고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되어 실제 삶 속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은 내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의 다른 한 면은 ‘순종’ 입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자 바다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메고 요단 강에 들어서자 범람하던 요단 강이 멈추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낫기를 원했지만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진 여인만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말고 내 생각을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들어내야 합니다. 신앙은 행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