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마땅히 해야 할 싸움
<마땅히 해야 할 싸움> 본문 말씀은 두 종류의 싸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북부 지역의 네 나라의 동맹국들과 남부 지역 다섯 나라의 동맹국들 간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권력, 돈 그리고 오기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 통에 인생이 부서진 사람이 있었는데 곧 롯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싸움을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화려함과 편리함을 좇아 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방법과 지식으로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런 롯이 세상 싸움 바람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인생을 도둑질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롯처럼 이 세상 싸움에 빠져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성도의 정체성을 깨닫고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전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 속에 있음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을 상대함이라” (에 6:11-12). 또 하나의 싸움은 아브라함이 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 동맹국들끼리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의 결과를 16절이 선포합니다. “다 찾아왔더라.” 성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그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육신의 눈으로 애굽에 내려 갔다가 비참한 인생을 만나고 말았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애굽의 비루한 삶으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롯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체하지 않고 롯을 구하려 싸움에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겨우 가신 318명을 데리고 네 나라 동맹국의 군사들과 싸웠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무모한 싸움처럼 보였지만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기에 무모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싸움에서 이겨 “다 찾아왔더라”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인생 속의 싸움에서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섬김에 있어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도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 넘고도 남는 파워를 갖게 합니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으면 환경과 상황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성도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예배와 섬김 그리고 기도 등을 등한히 하며 세상 싸움에 분주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시들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싸움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승리하게 되어 잃어버린 것을 ‘다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2026
나의 시선을 어디에!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에 따라 성공 인생 혹은 실패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말씀은 두 사람의 시선이 나오고 있습니다. 롯은 그의 시선을 보이는 것에, 완벽한 환경에 그리고 세상의 화려함과 편리함에 두고 살았습니다. 결국 이 시선이 그를 실패의 인생으로 이끌었습니다. 롯이 처음부터 소돔에 가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의 화려함과 편안함 그리고 완벽한 환경을 좇아가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의 눈에 악한 소돔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선포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인 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좇아 세상 것들을 좇아갑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교만하거나 혹은 얻지 못하면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어느 누구든지 욕심을 좇아 살아가면 그 마지막은 실패요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것을 좇아가고 있었을 때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가나안 땅”은 물리적인 땅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인 개념 즉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땅이요, 보여주신 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눈으로 살아가는 바람에 큰 낭패를 한번 당했습니다. 그는 이 실패의 교훈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의 시선을 눈에 보이는 것에, 세상의 화려함과 편리함 그리고 완벽하게 보이는 환경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머문 곳은 롯이 택한 곳에 비교하면 척박한 환경이었고 살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거라는 믿음. 비록 내 인생이 황폐하고 메말라서 살기에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가 보여주시는 길을 순종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 속에 간섭하시면 그 인생은 달라지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선포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에 그 곳에 많은 샘물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그 복을 채워주나이다”(85:5,6).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 패배의 인생,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 – 하나님의 구원이 그 인생에 임하면 성공적인 인생, 풍족하고 강한 인생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요셉, 다윗, 롯과 다니엘 등의 인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에 거주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헤브론”은 ‘교통’, ‘친교’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소망으로 삼고 오직 눈을 하나님께 두고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복이 되었고, 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026
끝까지 믿으라!
우리는 하늘로 솟구치는 믿음으로 살다가 때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왔으며 또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가 믿음의 실패를 했습니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눈을 우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이 보이는 대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자신의 눈을 우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오자 그는 믿음 보다는 자신의 눈을 의지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는 비굴하고 비참한 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가나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뜻에 따라 우리를 두신 자리입니다 – 십일조 생활, 예배, 기도 그리고 섬김의 생활, 교회, 가정, 직장과 사업장 등등. 그런데 그 ‘가나안’에 기근 즉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그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눈에 의지하여 있어야 할 자리에서 떠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민 23:19).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의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마귀는 하나님의 복을 빼앗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로 떨어져 나가도록 우리의 가나안에 기근을 가져다줍니다. 나의 눈으로 보면 머물러 있어야 할 가나안이 한탄과 근심의 장소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가나안이 생명의 장소요,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장소 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그러했으며, 다윗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라를 통해 약속의 씨기 나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라가 바로의 궁궐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바로로 하여금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떠나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려다가 비참한 인생에 빠지고 말았지만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을 향한 그의 약속을 지키시려고 바로에게 재앙은 내려 사라를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잠언 3장 5-7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다 할지라도 가나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는 길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은 그 어떤 인생 기근보다 더 크십니다. 인생 기근 마저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복이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섬기는 자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두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2026
내 인생의 황금기!
리더 코칭인 David Dru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제 미래는 더없이 밝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참되며 그 분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저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고 그분이 주시려는 모든 것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황금기
입니다.” 데이빗 드루리가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인생의 황금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과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 사이의 간격 때문에 실망과 좌절의 맛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송이 멘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송이가 손에 닿게 되면 금방 녹아버린 것처럼 겁쟁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마치 패배자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REVEAL Research Project> 가 일천 개가 넘는 교회 조사를 통해 활기가 있는 신앙 혹은 신앙의 황금기를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되는지 조사했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약 11퍼센트의 그리스도인만이 신앙의 황금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수가 약 22억으로 보는데 약 20억의 그리스도인이 무기력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조사 결과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애굽(죄의 노예)으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애굽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37절이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런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툭하면 인생 문제나 장애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갑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의 땅에 발이 묶여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담대 하라’, ‘두려워 말라,’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 두려워하지 않거나 담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을 먹고 사는 신분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신분입니다. “담대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