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초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흑인 남성들과 히스패닉 사람들은 공화당을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뜨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공화당을 지지했던 주된 요인은 ‘먹고 살기 힘들다’ 였다고 합니다. 민주당 정권 속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져 정권을 바꾸는데 표를 던졌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인생을 무너뜨리는 위험성은 ‘물질적인 불황’이 아니라 ‘삶의 불황’ 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풍랑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성경 속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인생의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건강한 인생을 세워갔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모습은 인생의 풍랑 중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힘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버리는 힘’ 입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제일 먼저 짐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풍랑을 통해 내가 이제까지 버리지 못한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물을 버리며, 아버지와 배를 버렸습니다. 세관직을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았을 때 세상적으로 자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다 버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인생을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는 나쁜 습관과 생각, 거짓, 불의, 시기, 질투 그리고 방탕함을 버려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풍랑 속에서도 우리는 능히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명 운동 선수들 역시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훈련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인생 풍랑을 이기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인생을 살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안일함과 교만이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적당주의와 게으름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갓난 아이의 마음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며 또한 의존해야 합니다. 단순한 믿음이 그의 권능을 보게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인생 중에 가장 소중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코끝의 호흡이 멈추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계획은 사라지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요, 한계입니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 이 후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을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계 20:13-14). ‘영생의 심판’과 ‘영벌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입니다. 사도 배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우리는 생명과 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새롭게 되는”의 원래 의미는 ‘다시 호흡하는’ 입니다. ‘다시 호흡하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의 호흡을 불어주셨습니다 (창 2:6).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잃어버렸습니다. 육체의 호흡은 죽음의 호흡입니다. 그래서 살면 살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호흡이 회복이 되면 인간을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성령’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게 됩니다. 믿는 자 안에 거하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성도는 상령 안에서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삶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기 위함입니다. 새롭게 하기 위함 입니다.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말씀 26절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서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합니다. “악한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빠져서 세상과 벗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무언가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 돌아서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때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호흡이 회복이 되어 죄로 죽었던 우리 삶이 살아나게 됩니다. 신선하게 됩니다.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인생의 최고 보물

 <내 인생의 최고 보물>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솔로몬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허무한 인생과 푯대를 정하고 살아가는 부름의 인생이 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걷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소망 없이 허무한 인생을 사람을 걷게 하고, 뛰게 하며 그리고 찬양의 인생으로 만들어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인생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고 부름의 상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광야 생활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앞의 환경과 상황 그리고 사람을 보며 살아가면서 불평과 낙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인생 속에 만나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거두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생수를 제공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환경과 상황 역시 변화합니다. 사람 역시 변합니다. 어제나 올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품고 살아가는 믿음을 “영혼의 닻”과 같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인생의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하게 서 있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선포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인생 길을 걷다 보면 배부를 때가 있고, 배고플 때가 있습니다. 넉넉할 때가 있고, 부족한 때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반석으로 삼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 능력 그리고 도우심으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믿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인생으로 세워주십니다. 우리의 눈이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 도둑질을 당하며, 망하고 죽게 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세워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며, 최고의 사랑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또한 회복하게 하시는 우리의 최고 보물이십니다.

인생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의 주체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도 단점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바로 요즘 말로 민중주의라고 하는 중우정치였습니다. 중우정치란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로, 민주주의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말입니다. 플라톤은 다수의 폭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의 ‘폭민정치’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빈민정치’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중우정치는 올바른 민주제가 시행되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단점이 심해지면 만들어지는 정치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팬덤정치, 그리고 패거리정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미국 역시 중우 정치의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바른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포퓰리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내의 신앙인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불량배와 같지만 기독교 가치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을 뽑을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흠이 덜 한 사람을 뽑을 것인지 – 이 두 가지 선택에서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사람의 손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사람 혹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은 느헤미야를 통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호의 호식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개인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하게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포퓰리즘과 거짓 선동에 귀를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우리 귀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 혼자는 약하지만,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왜 순종해야하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할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요 그리고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의 구주’와 ‘나의 주’’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순종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벧전 1: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 산 은혜’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을 포함합니다. ‘반쪽 자리 신앙’, ‘3분의 1의 신앙’ 혹은 4분의1의 신앙’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직무나 사역’(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순종하는 자식’ (벧전 1:14)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 주인은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창조주신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요, 반역이요 그리고 범죄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에게 죽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엡 2:2)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순종하는 자식의 특징을 보이며, 불순종의 습관에 빠져 있으며 그리고 불순종을 체질화 합니다. 불순종이 본성이 되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나의 주인이다’고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종’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세상 철학은 ‘개인주의’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순종의 사람입니까? 

가장 소중한 공동체, 교회

    이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교회’ 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헸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어린 양의 신부여,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요, 진리의 기둥과 기초이다. 개교회는 속량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요, 소수자들의 그룹이요, 이 땅에 거하는 천상의 무리요, 타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추수꾼들이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떼요, 동일한 마음을 가진 형제단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눈에 보이는 대표단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야기할 때 ‘사역’이나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말을 합니다. 그런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면을 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영적인 면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는 초자연적이며 또한 신적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령님과의 교통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그도의 생명과 성령과의 교통이 없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종교적 혹은 사회적 단체’에 불과합니다. 그런 교회는 예배는 단지 하나의 예식에 불과하며, 설교는 도덕적 강의이며 그리고 기도와 헌금은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역사가 드러나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방법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각 성도의 신앙의 표준 잣대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믿음은 그 모양이 어떠하든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모양만 있는 가짜 믿음입니다. 아울러 참된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지켜나가는 공동체입니다. 거짓 진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참 진리로써 빛을 비추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믿는 믿음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즉 성도의 믿음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별개의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개 교회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힘을 주시는 것은 성령님 이십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성령님과의 교통이 있는 교회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성령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그 교통을 통해 성령님의 권능이 성도 안에 흘러들어 오게 되어 성도가 마땅히 보여야 하며 또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 줍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성령님과의 교통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복을 쟁취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령한 복은 세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을 때 즉시 받는 복입니다. 그것은 죄사함, 칭의, 중생, 하나님의 자녀가 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으로 물려받는 복입니다. 이 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장차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며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를 통해 얻게 되는 복입니다. 이 복은 가만히 있으면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복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이겨내며, 성령 충만 속에서 성도로서의 열매들을 맺으며 그리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주신 은혜를 통해 성장하며,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의식하며 예배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 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서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담대히 들어가야 하듯이 우리 역시 담대함을 갖고 이 복을 차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 두 복들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미 그 복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것으로 이미 선포하신 복들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복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복을 차지하는데 방해하는 영적인 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내가 구하는 만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갈렙은 그가 받을 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위해 담대하게 싸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차지하기 위해 요청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리고 담대하면 담대할수록 그리고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의 복은 우리 것이 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도는 최고의 삶을 바라며 그리고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열매들을 맺어야 합니다.  성도는 적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큰 복을 구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열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존재(Be)와 행동(Do)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중요한 동사는 ‘존재하다(be)’와 ‘행동하다(do)’ 입니다. 전자는 ‘존재’를 , 후자는 ‘행위’를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님께서 먼저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존재(됨됨이’ 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됨됨이(be)’가 항상 중요합니다. 구속(redemption)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 즉 존재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도덕적 결함이 없었다면 인간의 악한 행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본성)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다나 강이 오염되는 것은 오염 물질을 내놓은 공장이 있듯이 인간의 악한 행위 배후에는 악한 생각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을 정화하려면 먼저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해야 하듯이 인간의 행위를 바꾸려면 우선 인간의 본성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즉 ‘행위’가 의로워지려면 근원적인 ‘존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존재(본성)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씻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거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함’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봉사(do)’가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be)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들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물이 나니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용납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건성으로 혹은 전혀 경외와 존경이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우리들이 예배하는 행위, 물질을 드리는 행위 그리고 섬기는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행동들 속에 우리의 진실한 마음, 경건한 마음 그리고 믿음이 들어 있지 않는다면 그 모든 행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존재) 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행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존재와 행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존재’가 빠진 ‘행동’은 하나님 앞에 결코 흠향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의 ‘존재’(됨됨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상황에 따라 인생을 판단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초와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큰 자”로 인정을 받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그런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왜 세례 요한이 그런 의심을 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가 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그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특별히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기대감은 순전히 우리 편에서 판단하고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실 거야’ 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황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치를 갖고 살아가갑니다. 그런데 세상 속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내용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상황이 찾아옵니다. 염려하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길목마다 ‘이것이 아닌데’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의구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고 사람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품게 되며, 다시 인생을 세워가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십니다

가장 뛰어난 신앙의 모습

가장 뛰어난 기도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음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바로 이 기도가 예수님과 마귀의 다른 점입니다. 마귀(계명성)가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선택을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의지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혼과 의지가 없는 로봇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걸어오시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회개로 향하도록 만드시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를 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들어 두셨지만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작정 천국에 우리를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로 회개를 하도록, 천국에 들어오도록 가만히 하십니다. 절대로 강압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좌지우지 아니하십니다. 선택의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죄’도 없고 ‘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죄와 의는 의지적 자유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면 실상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려면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밝혀진 것을 범하는 의지적 행위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자기 중심적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의지는 우리를 위해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의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지가 좇아가는 것을 거슬려 의지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가장 위대한 것은 그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킨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것이지만,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만 주의 주, 만 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가장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은 우리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이루어 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