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왕은 누구인가(1)?

우리 인생과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욕망’ 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자기를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정욕’ 입니다. 이 정욕으로 인하여 인생 속에 많은 싸움이 일어난다고 야고보는 선포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욕심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욕심의 포로가 되면 영적으로 어둡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또한 대적을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베드로와 요한을 겁박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이 그들 인생의 주인이심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합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대주재”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인데 ‘소유자’, ‘절대 통치자’ 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절대 통치자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혹은 유대 종교 지도자거나 혹은 세상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통치자요, 자신들의 인생의 주인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슬 시퍼런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절대 통치자로서, 모든 것의 소유자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갈 때 자신을 사랑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그가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지만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성공자가 되었지만, 사울은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바벨론 왕보다는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룻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을 때 룻은 줍는 인생으로부터 주는 인생이 되었고,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행복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로 삼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욕망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되어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신앙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됩니다. 내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통이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

    오늘날 성도들에게 ‘은혜 있는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 내 믿음을 세워주는 설교,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 마음을 시원하게 설교 등등이라고 말들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단 한 사람이라도 ‘오늘 설교를 듣는 데 너무나 불편했어’ 하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열의 아홉은 마음에 불편한 설교, 듣고 싶지 않는 주제를 다룬 설교, 약점을 파 헤친 설교를 ‘은혜로운 설교’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플로리다에서 목회하고 있는 David Cassidy 목사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성도 중에 주일 설교를 듣고 이런 댓글을 남겨 두었다 합니다. “지옥이라도 온 것처럼 아프네요.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댓글을 보고 큰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지게 하는 데에 그 역할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온전하게 세우고자 할 때 반드시 따르는 것은 고통입니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할 때 반드시 소독을 먼저 해야 합니다. 소독약을 바르는 것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살이 썩어 들어갈 때 연고만 바른 의사는 돌팔이입니다. 메스를 들어 썩어가는 부위를 도려내야 합니다. 엄청난 아픔이 동반됩니다. 그 다음에 연고를 바릅니다. 설교를 소망과 위로의 진리라고 말하지만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진리가 먼저 듣는 사람에게 와야 합니다. 소망과 위로가 진리보다 먼저 오는 것은 잘못된 설교이든지 아니면 잘못된 들음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만을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진리가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와서 그의 허물을 드러냈을 때 그 설교가 힘이 되며 위로가 되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나단의 설교는 다윗 왕의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포된 말씀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아팠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걸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날 선 칼이 나를 찌르며 쪼개는데 어떻게 아픔과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 아픔과 질병이 치료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이는 정상적인 치유는 없습니다. 성도는 진리를 통해 아파야 합니다. 불편할 정도로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 오늘 설교는 왜 이렇게 아프지?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될 때 그 다음에 위로와 소망, 힘과 용기 등이 찾아옵니다. 설교를 통해 마음이 먼저 찢어져야 합니다. 아파야 합니다.

인생의 주춧돌 (2)

기독교를 대항하는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믿음을 지켜 나가는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나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리 혹은 나의 소리를 듣고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믿음을 지키는 삶의 비결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 시절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도망치기도 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한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신앙은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왕으로 계실 때 이루어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들 안에 세상과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 놓아 예수님을 모실 자리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불안과 걱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자신이 왕으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왕이 아닌데 왕처럼 살아가면 역적 죄로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왕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것으로 즉 왕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 만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빌 3:7-9). 인생을 세워 나가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인생의 집을 세우고자 하면 그 인생의 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의 집을 세워주면 그 인생의 집은 튼튼한 집이 됩니다. 우리 인생 집의 주춧돌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삼고 살아갈 때 심령 속에 그리고 삶 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부어지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 대로 아름다운 인생이 세워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말짱 도루묵 신앙’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애를 썼는데 그 결과가 헛되거나 혹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을 때 ‘말짱 도루묵’이라고 말 합니다. 조선 중기 인조는 청 나라의 침공을 피해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금방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피난 생활이 길어졌습니다. 갖고 갔던 식량이 바닥이 나자 현지에서 나는 맛없고 거친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하루는 한 어부가 직접 잡았다면 한 생선을 가져왔습니다. 나인이 요리한 생선살을 먹고 인조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선 살이 입안에서 스스로 녹을 정도로 맛이 있었습니다. 인조는 어부를 불러 생선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어부는 ‘묵’이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목어’ 인데 그 지방 사투리로 발음한 것입니다. 인조는 이런 귀한 생선을 ‘묵’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은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후로 그 생선의 이름은 ‘은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피난 때에 먹었던 은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수란간 최고 요리사에게 은어를 요리하여 가져오게 했습니다. 인조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은어 요리를 먹었는데 웬걸 맛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전의 맛과는 너무 달라서 인조는 자신이 먹은 생선이 은어가 맞는지 거듭 확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맛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인조는 말했습니다. “오늘 이 후로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 그래서 이 생선은 ‘도루묵’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 듯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이전의 나 중심, 나의 편리함, 나의 만족 그리고 육신의 정욕을 좇아가던 삶으로 돌아갑니다. ‘도루묵’의 신자가 되어 살아 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도루묵’의 신앙은 지금까지 해 온 신앙의 애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때’가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뿌릴 때와 거둘 때 사이에는 ‘가꿈’이 반드시 있습니다. 물을 주며, 잡초를 제거하며 그리고 거름을 줍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꿈’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며, 나 자신을 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 답게 신앙의 변덕쟁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신앙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주춧돌 (1)

 <인생의 주춧돌(1)> 우리는 어느 때보다 반 기독교적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 아시아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 등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은 문화와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살아갔던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반 기독교적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상 부와 권력 등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무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성전 맡은 자입니다. 그들은 당시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력자들이 힘 없는 두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함” (2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배층이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극도로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 전파와 행하신 기적들이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자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까봐 바리새인들과 내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자 그들을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남자 만해도 오천 명이 넘게 예수님을 믿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니 생명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려움들과 유혹들로 인하여 믿음을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충성스러웠던 신앙을 추억으로 삼고 여러 가지 핑계로 신앙의 변질을 덮으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이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어둡고 또한 어둡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어둡게 살 것인지 아니면 빛을 드러내며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품에 안겨 있는데 주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갈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신 데 이를 버리고 세상을 주인으로 삼고 살 것입니까? 성도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춧돌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한 빛을 비추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을 세우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자가 됩니다.

신앙의 초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흑인 남성들과 히스패닉 사람들은 공화당을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뜨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공화당을 지지했던 주된 요인은 ‘먹고 살기 힘들다’ 였다고 합니다. 민주당 정권 속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져 정권을 바꾸는데 표를 던졌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먹고 사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인생을 무너뜨리는 위험성은 ‘물질적인 불황’이 아니라 ‘삶의 불황’ 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풍랑을 만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성경 속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인생의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건강한 인생을 세워갔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모습은 인생의 풍랑 중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힘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버리는 힘’ 입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제일 먼저 짐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풍랑을 통해 내가 이제까지 버리지 못한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물을 버리며, 아버지와 배를 버렸습니다. 세관직을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았을 때 세상적으로 자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다 버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인생을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는 나쁜 습관과 생각, 거짓, 불의, 시기, 질투 그리고 방탕함을 버려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풍랑 속에서도 우리는 능히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명 운동 선수들 역시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훈련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인생 풍랑을 이기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인생을 살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안일함과 교만이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적당주의와 게으름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갓난 아이의 마음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며 또한 의존해야 합니다. 단순한 믿음이 그의 권능을 보게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인생 중에 가장 소중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코끝의 호흡이 멈추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계획은 사라지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요, 한계입니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 이 후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을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계 20:13-14). ‘영생의 심판’과 ‘영벌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입니다. 사도 배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우리는 생명과 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새롭게 되는”의 원래 의미는 ‘다시 호흡하는’ 입니다. ‘다시 호흡하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의 호흡을 불어주셨습니다 (창 2:6).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잃어버렸습니다. 육체의 호흡은 죽음의 호흡입니다. 그래서 살면 살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호흡이 회복이 되면 인간을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성령’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게 됩니다. 믿는 자 안에 거하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성도는 상령 안에서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삶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기 위함입니다. 새롭게 하기 위함 입니다.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말씀 26절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서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합니다. “악한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빠져서 세상과 벗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무언가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 돌아서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때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호흡이 회복이 되어 죄로 죽었던 우리 삶이 살아나게 됩니다. 신선하게 됩니다.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인생의 최고 보물

 <내 인생의 최고 보물>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솔로몬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허무한 인생과 푯대를 정하고 살아가는 부름의 인생이 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걷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소망 없이 허무한 인생을 사람을 걷게 하고, 뛰게 하며 그리고 찬양의 인생으로 만들어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인생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고 부름의 상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광야 생활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앞의 환경과 상황 그리고 사람을 보며 살아가면서 불평과 낙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인생 속에 만나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거두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생수를 제공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환경과 상황 역시 변화합니다. 사람 역시 변합니다. 어제나 올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품고 살아가는 믿음을 “영혼의 닻”과 같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인생의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하게 서 있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선포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인생 길을 걷다 보면 배부를 때가 있고, 배고플 때가 있습니다. 넉넉할 때가 있고, 부족한 때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반석으로 삼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 능력 그리고 도우심으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믿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인생으로 세워주십니다. 우리의 눈이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 도둑질을 당하며, 망하고 죽게 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세워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며, 최고의 사랑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또한 회복하게 하시는 우리의 최고 보물이십니다.

인생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의 주체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도 단점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바로 요즘 말로 민중주의라고 하는 중우정치였습니다. 중우정치란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로, 민주주의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말입니다. 플라톤은 다수의 폭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의 ‘폭민정치’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빈민정치’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중우정치는 올바른 민주제가 시행되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단점이 심해지면 만들어지는 정치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팬덤정치, 그리고 패거리정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미국 역시 중우 정치의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바른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포퓰리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내의 신앙인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불량배와 같지만 기독교 가치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을 뽑을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흠이 덜 한 사람을 뽑을 것인지 – 이 두 가지 선택에서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사람의 손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사람 혹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은 느헤미야를 통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호의 호식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개인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하게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포퓰리즘과 거짓 선동에 귀를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우리 귀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 혼자는 약하지만,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왜 순종해야하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할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요 그리고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의 구주’와 ‘나의 주’’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순종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벧전 1: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 산 은혜’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을 포함합니다. ‘반쪽 자리 신앙’, ‘3분의 1의 신앙’ 혹은 4분의1의 신앙’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직무나 사역’(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순종하는 자식’ (벧전 1:14)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 주인은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창조주신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요, 반역이요 그리고 범죄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에게 죽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엡 2:2)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순종하는 자식의 특징을 보이며, 불순종의 습관에 빠져 있으며 그리고 불순종을 체질화 합니다. 불순종이 본성이 되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나의 주인이다’고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종’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세상 철학은 ‘개인주의’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순종의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