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소중한 공동체, 교회

    이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교회’ 입니다. A.W. 토저 목사님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헸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어린 양의 신부여,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요, 진리의 기둥과 기초이다. 개교회는 속량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요, 소수자들의 그룹이요, 이 땅에 거하는 천상의 무리요, 타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추수꾼들이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떼요, 동일한 마음을 가진 형제단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눈에 보이는 대표단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야기할 때 ‘사역’이나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말을 합니다. 그런 것은 교회의 외형적인 면을 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영적인 면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교회는 초자연적이며 또한 신적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령님과의 교통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그도의 생명과 성령과의 교통이 없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종교적 혹은 사회적 단체’에 불과합니다. 그런 교회는 예배는 단지 하나의 예식에 불과하며, 설교는 도덕적 강의이며 그리고 기도와 헌금은 자기 과시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역사가 드러나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방법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각 성도의 신앙의 표준 잣대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믿음은 그 모양이 어떠하든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모양만 있는 가짜 믿음입니다. 아울러 참된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지켜나가는 공동체입니다. 거짓 진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 참 진리로써 빛을 비추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믿는 믿음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즉 성도의 믿음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별개의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개 교회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힘을 주시는 것은 성령님 이십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성령님과의 교통이 있는 교회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성령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그 교통을 통해 성령님의 권능이 성도 안에 흘러들어 오게 되어 성도가 마땅히 보여야 하며 또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 줍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성령님과의 교통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복을 쟁취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령한 복은 세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을 때 즉시 받는 복입니다. 그것은 죄사함, 칭의, 중생, 하나님의 자녀가 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으로 물려받는 복입니다. 이 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장차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며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를 통해 얻게 되는 복입니다. 이 복은 가만히 있으면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복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이겨내며, 성령 충만 속에서 성도로서의 열매들을 맺으며 그리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주신 은혜를 통해 성장하며,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의식하며 예배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 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서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담대히 들어가야 하듯이 우리 역시 담대함을 갖고 이 복을 차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 두 복들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미 그 복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것으로 이미 선포하신 복들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복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복을 차지하는데 방해하는 영적인 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내가 구하는 만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갈렙은 그가 받을 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위해 담대하게 싸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차지하기 위해 요청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리고 담대하면 담대할수록 그리고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의 복은 우리 것이 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도는 최고의 삶을 바라며 그리고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열매들을 맺어야 합니다.  성도는 적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큰 복을 구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열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존재(Be)와 행동(Do)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중요한 동사는 ‘존재하다(be)’와 ‘행동하다(do)’ 입니다. 전자는 ‘존재’를 , 후자는 ‘행위’를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님께서 먼저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존재(됨됨이’ 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됨됨이(be)’가 항상 중요합니다. 구속(redemption)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 즉 존재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도덕적 결함이 없었다면 인간의 악한 행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본성)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다나 강이 오염되는 것은 오염 물질을 내놓은 공장이 있듯이 인간의 악한 행위 배후에는 악한 생각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을 정화하려면 먼저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해야 하듯이 인간의 행위를 바꾸려면 우선 인간의 본성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즉 ‘행위’가 의로워지려면 근원적인 ‘존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존재(본성)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씻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거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함’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봉사(do)’가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be)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들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물이 나니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용납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건성으로 혹은 전혀 경외와 존경이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우리들이 예배하는 행위, 물질을 드리는 행위 그리고 섬기는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행동들 속에 우리의 진실한 마음, 경건한 마음 그리고 믿음이 들어 있지 않는다면 그 모든 행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존재) 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행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존재와 행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존재’가 빠진 ‘행동’은 하나님 앞에 결코 흠향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의 ‘존재’(됨됨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상황에 따라 인생을 판단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초와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큰 자”로 인정을 받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그런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왜 세례 요한이 그런 의심을 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가 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그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특별히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기대감은 순전히 우리 편에서 판단하고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실 거야’ 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황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치를 갖고 살아가갑니다. 그런데 세상 속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내용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상황이 찾아옵니다. 염려하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길목마다 ‘이것이 아닌데’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의구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고 사람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품게 되며, 다시 인생을 세워가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십니다

가장 뛰어난 신앙의 모습

가장 뛰어난 기도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음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바로 이 기도가 예수님과 마귀의 다른 점입니다. 마귀(계명성)가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선택을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의지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혼과 의지가 없는 로봇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걸어오시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회개로 향하도록 만드시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를 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들어 두셨지만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작정 천국에 우리를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로 회개를 하도록, 천국에 들어오도록 가만히 하십니다. 절대로 강압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좌지우지 아니하십니다. 선택의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죄’도 없고 ‘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죄와 의는 의지적 자유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면 실상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려면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밝혀진 것을 범하는 의지적 행위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자기 중심적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의지는 우리를 위해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의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지가 좇아가는 것을 거슬려 의지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가장 위대한 것은 그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킨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것이지만,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만 주의 주, 만 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가장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은 우리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이루어 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많이 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give and take’ 입니다. 잘 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거나 혹은 착하면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에 간다는 원칙입니다. 즉 나 자신의 공로에 의하면 죽음 이 후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인간은 무능한 존재입니다. 롬 3:10-12절이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나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날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세상이 떠들썩 합니다. 논점은 ‘예수는 신인가 아니면 뛰어난 사상가인가?’ 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예수님은 사상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 1:15-16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요, 다스리시는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권능과 기사로 죄악으로 잘못된 인생을 능히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오면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면 건강한 인생, 행복한 인생,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인생 그리고 하나님께서 본래 정해 놓은 아름다운 인생으로 고쳐지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해 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골 1:21-22). 우리 스스로 구원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어 주셔서 우리 죄를 없애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나의 주와 구주로서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견고한 신앙

    우리의 신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온전한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잇는 분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확신은 신학적 교리에 멈추지 말고 우리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처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실성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거부를 당했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큰 고통과 무한한 연약함 가운데 ‘어찌하여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의심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함’에 대한 의심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하심과 그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쏟아내고 겉으로 드러난 증거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부정하는 모양으로 나타났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예수님은 보이셨고, 그 믿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했습니다. 신앙은 탁월한 사람들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우리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을 보면서 ‘저것은 산이다’ 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의를 하든 혹은 동의하지 않든지 간에 산은 산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산 만큼 견고한 사실로, 아니 산보다 무한히 변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주관적이지만, 오직 객관적 실재와 일치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산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의 믿음이 참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산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그 모습대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의 살아 계심과 말씀이 신앙의 반석입니다

성령의 사람

우리는 자신의 관심에 비추어서 세상을 바라보며, 평가하며 그리고 판단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세계관으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성도는 자기 관심과 세계관이 아니라 성령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봐야 합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 따라 16개의 다른 나라의 말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이 사람의 계획이나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건을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이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또한 증명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사람이 인생의 실상과 허상을 구별하게 됩니다. 빛과 어둠을 구별합니다. 선악을 구별합니다. 행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합니다. 콜라 병에 콜라가 들어 있어야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의 말씀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감정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관심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가 좋아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사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계 3:8). 그리고 예수님께서 복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붙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주님의 나라에 영원히 속할 자가 될 거라는 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