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니면 금 송아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존중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나, 사무엘 그리고 다윗 등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엘리 제사장 아들들과 사울 왕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존중하는 삶과 존중하지 않는 삶의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결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하기 보다는 하늘이 별들을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금 송아지를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신분입니다. 광야의 삶을 살아갈 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요, 혹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불신앙인은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의 말씀까지도 멸시합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아갑니다. 광야 생활은 에덴 동산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 것 같고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게 여겨져서 자신만의 금 송아지를 만들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입니다. 성도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치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 풍랑을 만나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난처이시기 때문 입니다. 우리들이 자신만의 금 송아지를 갖고 살아가면 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신이요, 그런 삶 속에 하나님의 복은 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금 송아지를 부숴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오로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여, 이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며, 그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베푸는 삶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설교를 통해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하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 역시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의 복의 통로로서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후에 이런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렇듯 베푸는 삶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 법칙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베푸는 선이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갚아 주십니다. 잠언 기자는 선포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19:1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에이, 나도 힘든데 뭘 도울 수 있어’ 등으로 자신만을 챙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처지에 상관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것으로 열심히 베풀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우리에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베푸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도록 기다리는 삶 보다는 내가 먼저 손을 펼쳐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질만이 도움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주거나 들을 귀를 빌려줘도 좋습니다. 격려의 손길과 말도 좋습니다. 우리가 작은 사랑의 손길을 펼쳐도 상대방이 살아갈 힘을 얻거나 용기를 갖게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뭔가 베풀기 전까지는 오늘을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손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베드로와 세례 요한처럼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과 개입에 대한 모든 계획표들이 우리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손길은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합니다((고전 2:9).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실 때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때 허점, 실수 그리고 어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실망과 의심을 품게 되어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허물을 범하고 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법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그냥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대로 하나님의 손길이 내 인생 속에 개입하고 있음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손이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인생을 빚어가는 하나님의 손길을 각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손길의 결과는 같습니다. 각 사람마다의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내용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모세의 인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 노릇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복으로써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행 7:20). 그를 죽이려 했던 애굽의 궁궐에서 양육을 받게 하셨으며, 최고의 학문과 실력을 쌓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손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의 자비, 긍휼 그리고 능력 속에서 우리 인생을 빚어 가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색깔이요 디자인일지라도 나중에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그것이 실패의 색깔이요, 디자인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의 의도된 손길이라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이루어 가실 때 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십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낮추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위해 그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씨 뿌림의 법칙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느니라”(갈 6:7)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인생은 ‘씨 뿌리기와 수확의 원칙’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농부가 수확하려면 씨앗을 뿌려야 하듯이 우리 인생 역시 가정, 직장과 사업장 그리고 대인 관계 등의 밭에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농부가 씨 뿌리리가 귀찮아 펑펑 놀게 된다면 그 어떤 수확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평생 기다려도 쌀 한 톨을 얻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수확하고자 한다면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입니다. 행복을 거두고자 한다면 행복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선물해야 합니다. 재물의 복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누군가에게 재물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사랑의 수확을 하고자 한다면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이삭의 시대 때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있었습니다. 이삭은 이 때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26장 12절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그 극심한 흉년 중에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렸습니다. 궁핍할 때에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혹은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믿음으로 씨았을 뿌리니 하나님께서 기적의 손길을 펼쳤습니다. “백 배”나 거두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종류의 기근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물질의 기근, 건강의 기근 그리고 환경의 기근 등이 찾아 옵니다. 우리는 그런 기근에 눌려서 포로가 되거나 혹은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삭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우리가 원하는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선포합니다. “어려운 때 일수록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시 37”1-3). ‘하나님,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씨앗을 뿌리지 않고 수확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기근 속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수확을 할 수 있도록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물질의 수확을 얻고자 한다면 물질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그리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움의 손을 펼쳐야 합니다. 건강의 복을 수확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내 몸을 사용해야 합니다. 외롭다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는 대신에 우리가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열매를 거두고자 하십니까? 그 열매를 위해 내가 먼저 씨를 뿌려야 합니다. 언제나 씨앗을 뿌리는 일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누구나 다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아갑니다. 본문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20대를 노예와 죄수로 살았습니다. 그가 만난 모든 불행들은 그의 통제 밖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의 가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을 기아로부터 살리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누군가의 영혼과 생명을 책임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에게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보호하심 속에 두고 우리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품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와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그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룻은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봉양해야 하는 나오미만이 있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나오미는 룻에게 인생의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통해 룻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이삭을 줍는 인생에서 밭의 안 주인이 되는 인생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한 끼 분의 음식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아직 있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이루어 지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이 곤두박질치는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본문말씀 10절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인생은 반드시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복된 인생으로 반드시 세워집니다. 인생의 어려움 중에 있습니까? 낙심과 염려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습니까? 인생의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 외에는 어떤 탈출구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

인생 속에서 ‘만남’은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만남이 인생 전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전부를 좌지우지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신분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해 그의 인생을 다스렸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신 우리 역시 그의 약속을 통해 우리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과 천국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복스러운 소망” 이라고 불렀습니다(딛 2:11-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본문 말씀 1절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서 그의 약속을 선포하셨습니다 9창 12:2).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질 뿐만 아니라 먼저 찾아와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신분이면서도 세상 생활에서 어려움과 문제 등을 만나게 되면 그 약속이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약속을 주셨을 때 그의 나이 75세이며, 자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방랑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듯이 성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약속을 이루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곧 보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입에는 힘이 있습니다!

중세 대표적인 신학자, 토머스 아퀴나스는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만물의 창조주 되시는 주여, 주님께서는 지혜의 모든 보화로 천사들에게 각자의 자리를 지정해 주셨고 찬란한 하늘 위에 경이로운 순서를 정하시어 각자의 자리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언 우주를 아름답게 수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와 진리의 원천이시며 만물의 고귀한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나 저는 어두워진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사오니 저의 마음에 주님의 밝은 빛을 비추시어 저의 무지와 죄악을 몰아 내소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입술을 온전하게 하시었나이다. 제 입의 말을 주장하시고 자의 입술을 어루만지사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게 하시고 속히 배우게 하시며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언제든 선포할 수 있게 하소서. 들어가고 나가는 저의 발걸음을 지켜주소서 저의 발걸음을 본향집으로 인도하소서. 주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문제의 산이 너무 높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고 산을 향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특별히 인생의 폭풍우 한가운데 있을 때 우리 입을 경계해야 합니다. 잠언 18장 21절은 선포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말이 환경을 좋게도 나쁘게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이 만든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생이 얼마나 꼬였는지에 대해 투덜거리며 불평하면 우리는 불평과 짜증으로 채워진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있으면 당연히 불평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믿음의 말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요엘 3:10).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누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줄 알았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말한 대로 그가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가난에 대하서 불평하지 말고 부유함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산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산이 옮겨지도록 선포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선포했듯이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크십니다(요일 4:4). 우리 입에는 놀라운 권세가 있습니다.   나의 인생을 바꾸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나의 입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 하듯이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은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3-24). 어떤 사람들은 승승장구의 삶을 살아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럭 저럭의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종의 자세를 갖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수고한 대로 열매들을 맺는 성공적인 삶이 되게 하십니다. 자신이 뱉은 말을 끝까지 지키고 일터에 정시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일에 열심히 일하며 아프다는 핑계로 일찍 퇴근하거나 결근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일찍 출근하고, 좀더 늦게 퇴근하는 자세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주어진 일에 게을리하며 잡담과 인터넷 채팅으로 업무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 왜 제게 복을 주시지 않는데요. 왜 저는 승진이 되지 않는데요’ 라고 불평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하나님의 복이 부어지겠습니까? 예배와 기도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직장과 사업장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에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everybody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아니하고 somebody로 살아가는 사람을 복 주십니다. 성도는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대충 살아가는 살아 가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신 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허름할지라도 잘 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직장이 좀 안 좋아도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내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사업장이 아직 원하는 궤도에 오르지 않았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을 부어 주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삶의 현장에서 보여줘야 합니다.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 하듯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그런 삶을 보상해 주십니다. “주께 하듯” 살아가나요?  

섬김과 기적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실 때 반드시 일꾼을 부르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도록 세움을 입은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지만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섬기도록 그런 은혜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인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성도로 부름을 입은 상급을 받도록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권능을 부어 주셔서 그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중국 지하 교회의 두 자매는 초신자에 불과했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복음을 전하자 교회가 없는 지역에 13개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는 물음에 “우리는 그냥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성령님께 여쭈었습니다. ‘저희가 무엇을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했습니다” 라고 두 자매는 대답했습니다.  초신자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고자 했을 때 어느 전문 사역자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역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은혜와 권능으로 채워 주시니 그런 놀라운 구원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없어도 ‘내가 하나님의 하인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일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섬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과 표적을 가져오는 권능을 부어 주십니다. 성도는 마음 속에 이런 소원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리라. 그리고 예수님의 종으로서 내게 명령하신 그의 뜻을 행하리라’. 우리에게 분부하신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증거하여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확장하는 일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나라를 섬겨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교회의 지체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꾼에게 은혜와 권능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받은 바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꾼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행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게 하십니다. 맡겨 주신 일에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귀한 성도요, 행복한 성도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나요?

성공과 형통을 가져옵니다. 사소한 일에 진실하지 못하면 큰 일에는 말할 것도 진실한 태도가 성공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만큼 삶 속에서의 태도가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진실하고 훌륭하며 믿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들의 이목을 받습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합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집을 어떻게 가꾸는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야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남의 시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이 되는 요건은 ‘진실함’ 입니다. 진실함이 없으면 우리가 행한 모든 것들이 아무런 영향력울 끼칠 수 없게 됩니다. 선한 영향력은 그 어느 것보다 ‘진실함’이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통한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이 최선이다>라는 말처럼 진실함이 인생없습니다. 거짓은 작은 성공을 가져올 수 있을 지 몰라도 절대로 큰 성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비록 진실하게 사는 것은 쉽지 않고 여러 장애물을 만나게 되지만 결국 이기는 것은 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진실함 때문에 어려움을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결국은 그들은 큰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의 눈이 그 사람에게 머물러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두렵고 염려가 되며 또한 무엇이 필요로 하겠습니까?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신 하나님 그리고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니 어찌 그 삶이 복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진실한 사람으로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나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함은 나를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는 보증수표입니다. 담대함과 확실성은 진실한 태도와 삶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잠 11:3). 말과 행위에 나의 진실함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