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선포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되는 삶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복이 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우상으로 가득 찬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을 베드로후서 1장 4절이 선포합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의 인생 목적은 ‘거룩’입니다. 세상 방식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마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복이 되는 비결입니다. (2) 하나님의 복이 되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다져진 생활기반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욕구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예레미야 선지자, 이사야 선지자 등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은 쉽지 않은 순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복의 통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복으로 준비하신 후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율법책을 …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7-8). 인생을 살다 보면 낙심과 두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내가 모세를 통해 너희에게 준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가 무엇이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이 법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 순종할 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3) 우리가 복이 되려면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은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구원의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이 무엇이었나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떠나는 일이었고, 아브라함은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롯은 의인이었지만 그는 사명을 무시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주신 사명대로 가나안 땅에 머물렀습니다. 복이 되려면 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명자가 복이 됩니다.

2025년 끝자락에서

엊그제 신년 축하 예배를 드린 것 같았는데 벌써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2025년 끝자락에 서 있는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그의 손길들과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고 살펴보는 지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을 합니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시라 나 자신이 되어 살아갑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무언가를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만족’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은혜를 입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며 친 백성으로 삼아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애굽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그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더 가관이었습니다. 농경의 신이라 여겨지던 바알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과 보호하심과 위로하심 등을 받았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근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분노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끊임없는 연단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리고 포로가 되어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2025년 끝자락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혹시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목자가 되어 주셔서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의 은혜를 누렸으면서도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의 무언가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거나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일을 겪게 되는 일은 너무나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을 섬기는 삶을 하나님이 결코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삶은 반드시 우상을 통해 얻어진 것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한 해가 가는구나’ 라고 하지 말고 진솔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라!

>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약점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진 말씀이 내 형편, 내 상황 그리고 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보다는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처럼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눈에 보이는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바벨론 포로가 되어 낙심과 절망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9절). 바벨론 제국이 너무나 강력한 힘으로 보여 염려와 낙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풀은 결국 마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모든 육체’는 ‘세상 영광’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제국은 마르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넘어서지 못할 것 같은 인생의 장애물도 하나님께서 입김을 한번 푹 불면 시들게 되며 마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9절). 성도는 낙심하게 만드는 인생의 골리앗, 인생의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1) 능력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홍해를 갈라 놓으시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며, 사자의 입을 봉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그리고 죄의 권세, 사망을 깨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 문제가 얼마나 무겁고 크든지 능력의 하나님께서 능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2) 우리의 상급과 보응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목마름과 공허감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상급을 주시며, 또한 보응해 주십니다.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대적자들보다 높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상급자이십니다. 동시에 대적자를 물리쳐 주시는 보응자 이십니다. (3) 하나님은 우리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존재 합니다. 양은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면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잘 알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며,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시며 그리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위로(3)

하나님의 위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임합니다. 3절은 선포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여기에서 “광야’나 “사막” 은 우리 마음, 우리 인생을 의미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 그리고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아갈 때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 속으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4절입니다. “골짜기 마다 돋우어지며”. “골짜기”는 자기 스스로 기가 죽어 있거나 자신을 비하시키는 ‘열등감’의 마음 혹은 인생을 의미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막아 버립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 명의 사람은 열등감을 품게 되었고, 그 열등감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옮겨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도록 길(마음/인생)을 닦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열등감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돋우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벧전2:9-10). 성도는 내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겸손과 정직함과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열등감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심령/인생을 닦아ㅑ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는 겸손한 심령과 삶 속에 임하게 됩니다 4절입니다.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에 평지가 될 것이요.”. 여기에서 “산”과 “언덕”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각자 마음 속에 있는 ‘교만의 산’과 ‘교만의 언덕’을 깎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으로 인해 죄를 범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자 했던 자들도 교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영적 눈과 귀를 닫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기 보다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을 두게 됩니다. 결국 성령의 근심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을 막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삶 속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2)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 체하시지 않습니다. 어려움과 아픔 등에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기분이 들어 장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보통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분노와 중독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성도는 세상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위로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의 용서하심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2절).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유가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이 없었던 그들에게 죄 사함의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 권세, 명예 그리고 세상 쾌락 등을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재능과 탁월함으로 인해 교만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등불이요 빛인데 그 말씀이 자신의 수치를 보여주면 가차없이 그 말씀을 꺼 버리고 자신이 생각과 고집으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 숭배를 징계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상 숭배를 통해 원수 마귀를 우리 인생을 도둑질하며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를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는 잠시 잠깐의 징계입니다. 그리고 그의 징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0,11).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에게 오면 하나님은 징계를 멈추시고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하나님의 용서하심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심령 속에 채워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그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로 들어 오게 됩니다. 나의 우상을 던져버리고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1)

<하나님의 위로(1)> 한때 ‘웰빙’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는데 오늘날은 ‘힐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웰빙’은 몸에 관한 관심이라면 ‘힐링’은 마음에 관한 관심입니다. 힐링 음악, 힐링 미술, 힐링 음료, 힐링 마사지, 힐링 삼림욕 등등 마음의 안정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힐링은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치료해 주십니다.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산을 정상이 있지만 광야는 길이 없습니다. 바람 한번 불면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광야길에서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필요로 합니다. 가야 할 인생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우리 인생은 광야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수시로 변합니다.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한다면 영적 나침반이 되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마실 물을 공급받고, 쉴 만한 곳에 머물게 되며, 불과 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인생의 나침반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세상 소리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낙심과 절망의 포로로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무언가를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인생의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고 멸망의 길로 끌고 갑니다. 갈증과 불만족, 근심과 절망 그리고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게 만듭니다. 자연스럽게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생을 버티면서 무언 가에 끌려 다니는 포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우리들이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성도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감사가 가져오는 기적

감사는 그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해 줍니다. 환경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전도 여행을 가셨을 때 열 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고 있었을 때 나병이 깨끗이 나음을 입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를 한 사마리아인에게 영혼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질병 치유에 대한 감사가 영혼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된 겁니다. 인생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와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심령 속에 생명의 생수가 흐르도록 해 주십니다. 담대함과 평안을 주십니다.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게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손길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예수님께로 와서 그를 낫게해 주신 구원의 손길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감사가 영혼 구원의 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한나늘 기도를 통해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세움을 입게 하셨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서원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더 멀어집니다. 주님께로 받은 바 된 그것으로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또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감사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감사에 눈이 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감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감사가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감사, 직장과 사업장을 주신 감사, 호흡하게 하시는 감사, 자녀에 대한 감사, 일용한 양식과 건강을 주시는 감사, 친구와 이웃을 주신 감사, 맘껏 예배하게 해 주시는 감사 등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감사를 드리되 진실한 감사, 믿음의 감사 그리고 사랑이 담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기쁨이 있는 인생

<기쁨이 있는 인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 인생은 마냥 기뻐할 수만 없습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한 고비를 만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거 말씀하시니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기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채워지게 됩니다. 과거에도 도와주셨으니 지금도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아픔과 고통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들이 기쁨과 행복의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주님의 평안이 우리 안에 깃들게 됩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알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머물게 됩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삼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5절).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마구잡이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고 주어진 인생을 힘껏 살아가야 합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긍정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가시를 통해 오히려 그의 자녀로 하여금 성공적인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바라봄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겉으로 고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위하여 그 고통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움을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 문제’를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지혜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기쁨이 회복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의 가치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성도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를 낮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본문 말씀은 성도의 값어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4절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신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전능하시며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신분입니다. 요일 4장 10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선포합니다. 롬 5장 8절은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모습으로는 ‘은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심령 속에 이 은혜가 흘러 넘쳐야 합니다. 이 은혜가 마르게 되면 금세 우리 심령 안에 불안과 근심, 불평과 원망이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마치 홀로 버려진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덮어주고 있습니다. 비바람이 불어 쳐도 태양은 가리워져 있을 뿐이지 여전히 태양은 떠 있는 것처럼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이요,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삼고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4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를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신분일 뿐만 아니라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신분입니다.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해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 모습은 성령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며, 선포된 말씀을 참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5절). 성령께서 심령 안에서 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며, 이 세상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가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마귀에게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 믿는 자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누가 믿는 사람입니까? (2)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하는 근거로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믿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성령의 부으심’, ‘성령을 받음’ 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우리 삶 속에서 믿는 사람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겉모습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성령의 다스림 속에서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의 열매는 우리 스스로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지요, 예수님을 나무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나무에 달려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성도가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달라붙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도록 권능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두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세력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고자 하는 세력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육체의 소욕을 좇는 세력은 죄의 본성이요, 성령의 소욕을 좇는 세력은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육체의 소욕을 능히 이길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거룩한 삶을 저절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