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는지라!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그들이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서 영접을 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그 까닭이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니 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두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게 됩니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성령 세례’ 혹은 ‘성령 충만’ 혹은 ‘성령의 부어주심’ 혹은 ‘성령 받음’ 입니다.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 경험을 ‘성령 충만’, ‘성령의 임하심’, ‘성령 세례’, ‘성령을 받음’ 등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이 믿는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은사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고전 12장;롬 12장). 뿐만 아니라 성령의 계속적인 다스림을 받게 되면(내주하시는 성령)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게 됩니다(갈 5장). 성도는 성령을 받아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거듭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받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령의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성도들이 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나자 성령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또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 권속들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10:44).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신 능력으로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 고 하면 더 하려고 기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해 많은 것들을 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따른 명령은 613개입니다. 해야 할 것은 248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365개입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라는 명령보다 더 많습니다. 우리에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한 제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안전과 복을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삶을 위해 ‘하자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다스리는 능력과 지혜를 또한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동물 간의 차이점들 중의 하나는 사람은 삶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판단을 내리지 어떤 기준이 있어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삶의 기준을 갖고 그 기준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했으니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뿐만 아니라 양심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에 근거하여 살아갈 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바람에 양심을 버리고 살아갑니다. 그 바람에 스스로 사람 됨을 포기하고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우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금지된 것을 피하는 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고집과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음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하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의 통로입니다. 단지 그 복의 통로가 좁을 뿐입니다. 하지만 좁더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사랑해야 합니다. 탐욕을 버리라고 하시니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불평 말라 하시니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 말라’하면 안 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생을 치유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든 인생을 치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절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 절망을 치유하게 하는 약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절망은 치유됩니다. 12년동안 소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38년동안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치유를 받아 절망의 병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또한 복음은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불평과 원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잠언 기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선포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위협 때문에 억울한 마음으로 동굴 속에 자기를 갇혀 두었지만 그는 결국 이런 선포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 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시 57:7). 다윗은 우울한 감정과 상황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갔습니다. 복음의 포로로 살아가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자 그들에게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존 파이퍼 신학자는 “전도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어 마음의 병을 치유하게 합니다. 또한 복음은 육신의 병을 치유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천국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많은 중풍병자들이 그리고 못 걷는 사람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7절).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치유를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능히 치유하고도 남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영혼의 병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절망의 병을 치유합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육신의 병을 치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삶 속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의 영광과 구원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빌립이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듣고 그들의 믿고.”  

신앙은 행동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운명이 바꾸어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는 삶을 살아가라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후에 어떤 사람이 자신도 독립 운동가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독립 운동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불 속에서 날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백날 이불 속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생각을 바꾼다고 삶이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학자는 이렇게 말 합니다. ‘생각만 바꾸지 말고 바꾼 생각대로 행동을 하라.’ 부자가 되려면 ‘나는 부자야’ 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부자가 된 것처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뛰어난 가르침은 ‘산상수훈’ 입니다. 주옥 같은 수많은 교훈을 주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 24-27).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혹은 마음 속에 품고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되어 실제 삶 속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은 내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의 다른 한 면은 ‘순종’ 입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자 바다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메고 요단 강에 들어서자 범람하던 요단 강이 멈추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낫기를 원했지만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진 여인만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말고 내 생각을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들어내야 합니다. 신앙은 행동입니다.

누구의 포로입니까?(2)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바람 즉 환경 탓을 하지만 실제로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방향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신앙의 방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가든지 혹은 세상을 향해 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든지 혹은 마귀의 포로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믿음의 닻을 올리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갔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다스림 즉 성령의 충만을 입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역으로 하나님의 포로가 되지 않으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신앙에서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을 입게 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면 성도는 환경 때문에 웃고 울고 합니다. 광야 생활 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다가 광야 생활로 인해 불편 해지니 온갖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포로가 된 성도는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이 세상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한때 자랑했던 세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영광은 일시적이며 오래가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언젠가 쇠약하고 없어질 이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땅 위에서 가야 할 방향을 걸어가게 됩니다. 무엇을 취하며, 버려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고 하늘 나라에 상급을 쌓은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게 됩니다. 누가 하늘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예비해 두신 면류관을 받게 됩니까?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신분은 하나님의 포로입니다.

누구의 포로입니까?(1)

누구든지 인생 속에서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생은 누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영광 혹은 멸시, 생명 혹은 죽음, 구원 혹은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포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반면에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갔습니다. 거짓 신앙과 욕망의 포로로서 살아가고 있던 허물을 지적했던 스데반의 설교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욕망의 포로가 된 그들은 회개보다는 스데반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 철저한 회개를 했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었기에 회개의 열매를 맺었지만, 사울 왕은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었기에 여전히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지식과 감정과 더불어 반드시 성도들이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의지 혹은 행동 입니다. 성도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감정을 행함으로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성도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성도는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좇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삶은 세상과 타협하며 무지개 빛과 같은 가짜를 좇다가 결국 멸망의 자리에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욕망의 포로가 아니라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그 무언가를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황금과 다이아몬드 사업을 통해 영국에 막대한 돈을 가져다주어 당시 영국민의 찬사를 받았던 세실 로즈는 오늘날 ‘약탈자’라는 오명 속에서 쓰레기 같은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리빙스턴은 당시에는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날 그는 전 세계인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행복한 인생입니까? 누가 행복자입니까?

진실한 신앙

본문 말씀에서 스데반은 ‘증거 장막’을 통해 진실한 신앙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성막을 만들어 하는지를 세세하게 지시하셨습니다(44절). 이 말씀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우리 마음대로 혹은 취향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식대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억누르거나 구속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함입니다. 성막 중심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성전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앙은 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외식이며, 외식적인 신앙은 하나님 앞에 ‘죄’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내쫓김을 당하고 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임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며 그리고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신앙이 진실한 신앙이며 그리고 하나님께 흠향 되는 신앙입니다. 주일에만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도 계십니다. 우리 집, 직장과 사업장 속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 입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예배하며 기도하며 그리고 봉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자되기 원하며, 건강하기 원하며 또한 원하는 삶을 갖고자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신앙 생활을 삶 속에서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믿고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감동을 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거스르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 속에 죄를 도려내어 거듭난 속마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심어지게 되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이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신앙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이 없이는 바른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성장의 삶입니다. 자라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이듯이 성장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도록 애쓰고 노력하며, 배우고 확신하는 데에 거해야 합니다. 셋째는, 성숙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야 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육신의 눈을 빼앗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팔뜨기 눈으로 살아갑니다. 한눈으로는 예수님을, 다른 한눈으로는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기형적인 눈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런 기형적인 눈 혹은 시각이 보이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자신의 눈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기형적인 눈과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른 눈으로 삶을 바라보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비뚤어진 믿음, 비뚤어진 생각과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으로 살아가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마치 사사 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바른 신앙은 자기의 지식, 경험, 방법 그리고 사고 방식 등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 앞에 자기 전공을 잊어버려야만 예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살아온 전문 어부였습니다. 고기 잡는 것에 베테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깊은 데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자기 전공을 접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밤새 헛수고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예수님께 내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물 위를 걷게 되는 기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영적 비결은 자신의 전공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신앙이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만들며 또한 구원의 열매들이 맺어지게 됩니다.  마귀는 하루에도 숱하게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듭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려고 공격을 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만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 아니면 금 송아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존중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나, 사무엘 그리고 다윗 등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엘리 제사장 아들들과 사울 왕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존중하는 삶과 존중하지 않는 삶의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결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하기 보다는 하늘이 별들을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금 송아지를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신분입니다. 광야의 삶을 살아갈 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요, 혹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불신앙인은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의 말씀까지도 멸시합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아갑니다. 광야 생활은 에덴 동산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 것 같고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게 여겨져서 자신만의 금 송아지를 만들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입니다. 성도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치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 풍랑을 만나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난처이시기 때문 입니다. 우리들이 자신만의 금 송아지를 갖고 살아가면 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신이요, 그런 삶 속에 하나님의 복은 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금 송아지를 부숴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오로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여, 이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며, 그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베푸는 삶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설교를 통해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하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 역시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의 복의 통로로서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후에 이런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렇듯 베푸는 삶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 법칙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그 베푸는 선이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갚아 주십니다. 잠언 기자는 선포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19:1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에이, 나도 힘든데 뭘 도울 수 있어’ 등으로 자신만을 챙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처지에 상관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것으로 열심히 베풀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우리에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베푸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도록 기다리는 삶 보다는 내가 먼저 손을 펼쳐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질만이 도움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주거나 들을 귀를 빌려줘도 좋습니다. 격려의 손길과 말도 좋습니다. 우리가 작은 사랑의 손길을 펼쳐도 상대방이 살아갈 힘을 얻거나 용기를 갖게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뭔가 베풀기 전까지는 오늘을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