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의 단계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편의 단계, 위기 단계 그리고 확신 단계. 첫 번째 단계는 ‘편의 단계’인데 마치 편의점을 이용하듯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는지에 맞춰지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유익들에 주시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이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1 단계의 문제점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제한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께 순종하기기 편리한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 내가 편하면 순종하고, 불편하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수준이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위기 단계’ 입니다. 이 단계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단계입니다. 2 단계의 믿음의 특징은 누구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든지 아니면 돌아서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만날 때 두 번째 단계에서 예전 단계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기를 허용하실 때 우리가 단지 그 문제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27편 8절입니다. “주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그의 손 만을 찾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얼굴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즉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와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세 번째 단계는 ‘확신 단계’ 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상황 속애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고 순종적인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발전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주여, 나에게 복을 주세요’ 라는 태도보다는 ‘주여, 나를 받으소서’ 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단계는 복을 구하기보다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기적을 가져오는 신앙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 그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초청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신앙을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고 그 믿음을 선포하는 신앙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선포를 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병든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성도는 경험과 이성으로 예수님의 권능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권능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경을 꾸짖고, 문제들을 꾸짖고 그리고 병 낫기를 선포해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다윗은 그의 힘과 능력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속에 우리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중풍병만이 병이 아닙니다. 우리는 재정의 중풍병, 인간 관계 중풍병, 불안과 염려의 중풍병 – 성도는 이런 중풍병에 주저 앉아 있거나 누워있지 말고 예수님의 권능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 하노니 인생의 중풍병아 내게서 떠날지어다!’ (2) 기도가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나와 같은 일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 그 말씀이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자 한다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다니엘을 죽을 지도 모르는데 기도에 전혀 힘을 썼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보수를 위해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바다를 갈라지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줍니다. 지는 해를 멈추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을 가져오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잘 죽어야 합니다!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될 때마다 항상 내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잘 죽어야 한다’ 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죽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살다가 죽는 것,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죽는 것 등등이 ‘잘 죽는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런 것들이 정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육신의 장막을 떠나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이 시시하게 여겨질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혹은 이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안달을 냈는가 싶어 좀 어이가 없고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잘 죽는 것’은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내가 어디에 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정답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정답을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는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풍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차고 넘치는 곡식을 위해 헌 곡간을 헐고 큰 곡간을 지어 곡식을 잘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 부자는 그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졌으며, 또한 누리고 싶은 것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누릴 만큼 건강했습니다. 누가 봐도 잘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는 잘 죽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삶’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되는 날 그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잘 죽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내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잘 살았는지를 몰라도 잘 죽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잘 죽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번 스스로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가져야 할 것 (2)

초대 교회들은 세상적인 권세, 뛰어난 프로그램 그리고 부요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강하게 세워져 나갔습니다. 초대 교회들이 무엇을 갖고 있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3) 교회는 영적 건강을 갖고 있어야합니다. “든든히 서 가고”의 의미는 점점 더 강해지며 성장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잃으면 마음이 있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영적 건강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초대 교회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었나요? 그들은 ‘예배’에 힘썼습니다. 초대 교회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으며, 기도에 전적으로 힘을 썼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사니 초대 교회들은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영원한 건축물을 쌓아 갔습니다. 영적 건강은 예배를 통해 주어집니다. (4)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호해 주시지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교회는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방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5) 교회는 ‘성령의 위로’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위로가 초대 교회들 안에 흘러 넘쳤습니다. 무서운 핍박을 받고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권면과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우리는 위로를 받을 때 힘을 얻게 됩니다. 하물며 성령께서 위로해 주시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성령의 위로가 부어지면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위로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초대 교회들은 극심한 박해와 핍박 속에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성령의 위로하심 속에 초대 교회들은 성장했습니다. 믿음을 놓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갔습니다. 성령의 위로가 교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믿음의 기쁨이 회복되며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는 초대 교회들이 갖고 있었던 것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과 예수님의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건강,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를 가져야 합니다.

영혼을 가꾸어 주는 성경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만나고 싶어하고,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성경’ 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표현하신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섭리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다섯 가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존경입니다. 이해입니다. 책임입니다. 그리고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뿐인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 번째 큰 사랑은 ‘성경’ 입니다. 하나님의 큰 선물이 ‘성경’ 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그의 음성을 듣게 되며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편지’ 입니다. 또한 성경은 ‘영혼의 거울’ 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얼굴을 그냥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열심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습니다. 영혼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습을 갖고 살아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성경’만이 우리 영혼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나의 교만함과 완악함을 보게 됩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탐욕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해 줍니다. 성경은 영혼의 거울로서 우리 영혼의 모습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예쁘게 해 주는 화장품과 같은 역할을 해 줍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가꾸어야 합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것(1)

원수 마귀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십자가의 복음 대신에 다른 것을 교회로 하여금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허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메시지보다는 이 세상 메시지를 더 선호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세상 방식과 문화를 더 좇아갑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 세상 유혹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 입니다. 세상 방식과 문화를 좇아가는 교회는 결코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은 ‘성령 충만’ 입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게 증거했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해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120명의 성도들은 무명한 자들이며, 세상적인 파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권능으로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주시는 권능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의 교회로 삼아 주셨습니다. 또한 교회가 가져야 할 것은 ‘평안’ 입니다. 본문 말씀은 초대 교회가 평안한 교회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평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초대 교회가 평안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갖고 있었던 평안은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이었습니다(요 14:27). 세상은 평안이 아니라 편안을 주워 성도를 믿음의 삶에서 떨어지게 만듭니다. 인생의 평강은 예수님께로 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은 그가 주신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요, 장차 천국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통해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바울은 이 평안 갖고 있었기에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것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평안은 주님과의 친밀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세상 가치관

세상이 참으로 빠르게 변화가 되면서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섭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삶의 풍속도 엄청나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풍속을 보면 이전에는 혼전 임신을 쉬쉬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동거와 출산이 먼저 이루어지고 결혼식을 치룹니다. 혼전 임신이 오히려 축하를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결혼관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런 변화가 신앙 생활 안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보다는 사람 중심이 더 우선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신다’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필요가 있는가? ‘십일조는 율법적 명령이니 십일조를 굳이 안 해도 돼’, ‘주일 성수나 새벽 기도는 이 시대에 맞는 걸까?’ 등등. 이렇듯 신앙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론과 주장이 초신자나 신앙이 얇은 사람에게 신앙 성장의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교회 지도자나 신학자들이 신앙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많은 신앙인들이 혼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또한 성경 중심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며,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교회를 통해 신앙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직장도, 학교도 아니며, 사교장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며, 천국의 훈련장이며 또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열릴 연회장입니다. 예배는 성도에게 있어서 특권이지 아름다운 의무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받아 세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움을 입는 것이 예배입니다. 헌금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오직 바른 예배를 통하여 성도는 성도가 되게 됩니다.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서 드려져야 합니다. 사람 중심의 신앙 생활은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만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뛰어야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한때 바울은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은 실상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다메석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은 어떤 삶의 모습이었습니까? (1)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후 그의 삶 속에서 항상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야만 신앙 생활이 천국이 됩니다. 신앙을 억지로 하게 되면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온통 예수님만 바라보며, 삶 속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어도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무늬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안팎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디딤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회심을 의심했지만 그런 바울을 도와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성도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같은 생각과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 무슨 일이든지 겸손함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세워주셨듯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디딤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며, 위로하며, 사랑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세워주는 삶을 평생 살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가치!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게 많은 사람들에게 K 드라마의 우수성을 알린 <폭삭 속았수다> 드라마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에게 딸이 엄마의 인생이 어떻는가에 물었을 때 할머니가 “하루 하루가 숨이 차는 인생” 이었다고 말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소풍이었소, 아니면 불행이었소?’ 라고 딸이 묻자 할머니가 대답을 합니다. ‘너희들을 낳아 평생 너희들을 보고 살았으니 소풍이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숨이 차도록 인생살이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생을 소풍으로 여긴 것은 자녀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차지하는 자리는 대단합니다. 어쩌면 한 가정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녀’입니다. 자녀 때문에 웃고, 울며 또한 행복해하며 불행 해합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녀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며, 가장 관심과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녀 때문에 ‘인생은 소풍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극한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7-38).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느끼거나 확신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함을 가져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하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확신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능히 구원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울아, 사울아!> 만남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좋은 만남은 인생 행복의 밑거름이지만 나쁜 만남은 인생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 입니다. ‘몸짓’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의미가 있는 인생 ‘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한 인생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 입니다. 바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만남이 ‘예수님과 바울’의 만남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당시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유럽에 들어간 복음이 미국에, 미국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듯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진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을 통해서입니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바울이 다메석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꽃’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꽃’의 인생 즉 의미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을 통해 누군가가 구원을 받고, 내 가정, 내 직장, 내 생업터, 내 교회 그리고 지역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영광스러운 향기를 드러내는 ‘꽃’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 속에 이 만남의 사건을 깨닫게 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그의 종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 속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였고, 그의 약속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천국 시민이요, 성도요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그의 자녀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꽃’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꽃’으로서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꽃이 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우리 역시 하나님의 꽃으로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꽃으로서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우리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