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값을 해야지요!

    ‘꼴값 떨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꼴’은 얼굴 혹은 몸의 형태와 자세를 의미하며, ‘값’은 ‘품격’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품격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 품격대로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비꼬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한때 교육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한다고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상이 ‘계몽주의’ 입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면 유토피아가 세워진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사람의 품격을 갖추게 한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이미 입증이 되었습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훨씬 더 크고 무겁습니다. 교육이 그 사람의 품성을 더 좋게 하거나 혹은 바꾸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꼴값’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꼴값’의 삶을 살아가려면 ‘눈’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눈’의 판단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꾸어지지 않으면 그 교회 생활은 종교 생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꼴값’ 달라지지 않는 것은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교만의 눈, 의심의 눈, 시기의 눈 그리고 무례한 눈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온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 생활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종교 생활의 견지에서 보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최고로 멋지며 본받을 만한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 기도 세 번, 일주일에 금식 두 번 그리고 모든 헌금들과 구제 활동 등은 그야말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꼴값은 전혀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교만과 위선 그리고 자랑과 자기 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겸손과 진실함 그리고 하나님 자랑과 하나님의 의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은 내 눈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세상의 판단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눈. 나의 선호도와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다스림을 사모하는 눈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나의 얼굴과 삶 그리고 말씨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성경 속에서 멸망을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불순종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당했으며, 징계 후에도 여전히 말씀을 무시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성도가 어떤 물질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거짓 신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 중의 가장 강력한 거짓 신은 ‘물질’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전무후무한 모습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물질을 공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삼고 그가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을 공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 라는 의미는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는 물질을 자신의 신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선한 일을 위하여 물질을 섬기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서는 팥 죽 한 그릇을 위해 하나님의 것을 무시했습니다. 삼손은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무시했습니다. 발람은 발락이 준 뇌물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위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성도의 물질관은 우리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그리고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도가 가져야 할 물질관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으로 살지 않고 위선적인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사랑과 헌신이 아니라 자기 자랑과 의를 더 위에 두었습니다. 결국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물질 전체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물질을 그들의 신으로 삼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물질의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나바처럼 진실함으로 성령을 좇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춰질 것이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진실함으로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넌 하나님의 자녀야!

아버지와 아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만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덤불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릎에 까진 상처를 본 아들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와줘요!’ 그러자 어디서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도와줘요!’ 놀라 어리둥절한 아들은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아들이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너는 겁쟁이야!’ ‘너는 겁쟁이야!’ ‘너는 바보야!’ ‘너는 바보야!’ 그때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은 덤불에서 빼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껄껄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그것은 메아리란다. 메아리의 다른 이름은 ‘인생’이지.’ 그러면서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는 승자야!’ 역시나 목소리가 돌아왔습니다. ‘너는 승자야!’ 아버지가 또 말했습니다.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습니다. ‘아들아, 인생이 이렇 단다. 뭐든 네가 보내는 그대로 돌아오지.’ 지금 나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거 내가 내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죄인이었습니다. 장래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지금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장점들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단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단점 때문에 주눅이 들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단점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주저 앉아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단점을 가진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완전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해도, 부끄러운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자녀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원수였던 우리와 화해를 하셨으니 우리 역시 스스로 우리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약점을 가진 우리를 그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를 내어 놓은 아브라함을 사용하셨습니다. 실수투성이의 야곱을 약속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과 기도로써 우리를 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넌 하나님의 자녀야!

나의 왕은 누구인가?(2)

 <나의 왕은 누구인가 (2)> 성도는 인생의 왕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대 주재” 즉 ‘절대 통치자’ 이심을 믿었습니다. 성도는 절대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과 섭리로써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데 경륜과 섭리로 일하십니다. ‘경륜’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행사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섭리’는 인간의 믿음과 의지를 사용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며,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다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처음 지은 우주는 불로써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 단독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경륜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을 이루어 가실 때 개개인의 의지와 순종 그리고 믿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는 자에게 복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 경륜을 믿고 그를 예배하며, 소망을 두고 그리고 의지할 때 약속의 복을 차지합니다. 이것이’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본문 말씀 속의 베드로, 요한과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모든 핍박과 고통은 겉으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을 했으며, 그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그들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통치자임을 믿는 성도는 그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도록 힘써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좇아 멸망의 심판을 받는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가 각자 삶 속에서 이루어져서 영생의 상급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한 그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인생이 세우지고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공자의 비결

리더십 전문가 Skip Prichard는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발간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선정한 ‘최고의 스승 100인’ 중 한 사람입니다. Skip Prichard는 성공의 비결은 <실패에서 배워라> 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실패를 합니다. 그런데 그 실패 후에 그 실패를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실패로부터 성공의 비결을 찾는 것이 성공자와 실패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성공의 5가지 교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내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2. 다른 사람이 아닌 내 꿈을 찾는다. 3. 변명하지 않는다. 4.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5. 시간의 절박함을 느끼며 목표에만 집중한다. Skip이 말한 교훈을 이렇게 응용하면 어떻습니까? <신앙 성공의 다섯 가지 비결> 1. 나는 하나님의 완제품이다. 2.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3. 핑계거리를 만들지 말라. 4. 믿음의 백성들과 교제를 한다. 5.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간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 모두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200만 백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손길로 애굽으로부터 나왔지만(부르심)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택하심) 출애굽 1 세대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12명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가룟 유다는 택하심을 입지 못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대제사장,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택하심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짧아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택하심을 입지 못한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했습니다. 스스로 팽개쳤습니다. 불순종과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신분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르심을 받았으면 순종의 믿음을 통해 택하심의 자리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들과 이 땅 위의 약속의 복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왕은 누구인가(1)?

우리 인생과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욕망’ 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자기를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정욕’ 입니다. 이 정욕으로 인하여 인생 속에 많은 싸움이 일어난다고 야고보는 선포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욕심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욕심의 포로가 되면 영적으로 어둡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또한 대적을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베드로와 요한을 겁박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이 그들 인생의 주인이심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합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대주재”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인데 ‘소유자’, ‘절대 통치자’ 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절대 통치자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혹은 유대 종교 지도자거나 혹은 세상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통치자요, 자신들의 인생의 주인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슬 시퍼런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절대 통치자로서, 모든 것의 소유자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갈 때 자신을 사랑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그가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지만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성공자가 되었지만, 사울은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바벨론 왕보다는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룻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을 때 룻은 줍는 인생으로부터 주는 인생이 되었고,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행복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로 삼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욕망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되어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신앙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됩니다. 내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통이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

    오늘날 성도들에게 ‘은혜 있는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 내 믿음을 세워주는 설교,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 마음을 시원하게 설교 등등이라고 말들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단 한 사람이라도 ‘오늘 설교를 듣는 데 너무나 불편했어’ 하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열의 아홉은 마음에 불편한 설교, 듣고 싶지 않는 주제를 다룬 설교, 약점을 파 헤친 설교를 ‘은혜로운 설교’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플로리다에서 목회하고 있는 David Cassidy 목사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성도 중에 주일 설교를 듣고 이런 댓글을 남겨 두었다 합니다. “지옥이라도 온 것처럼 아프네요.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댓글을 보고 큰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지게 하는 데에 그 역할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온전하게 세우고자 할 때 반드시 따르는 것은 고통입니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할 때 반드시 소독을 먼저 해야 합니다. 소독약을 바르는 것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살이 썩어 들어갈 때 연고만 바른 의사는 돌팔이입니다. 메스를 들어 썩어가는 부위를 도려내야 합니다. 엄청난 아픔이 동반됩니다. 그 다음에 연고를 바릅니다. 설교를 소망과 위로의 진리라고 말하지만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진리가 먼저 듣는 사람에게 와야 합니다. 소망과 위로가 진리보다 먼저 오는 것은 잘못된 설교이든지 아니면 잘못된 들음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만을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진리가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와서 그의 허물을 드러냈을 때 그 설교가 힘이 되며 위로가 되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나단의 설교는 다윗 왕의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포된 말씀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아팠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걸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날 선 칼이 나를 찌르며 쪼개는데 어떻게 아픔과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 아픔과 질병이 치료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이는 정상적인 치유는 없습니다. 성도는 진리를 통해 아파야 합니다. 불편할 정도로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 오늘 설교는 왜 이렇게 아프지?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될 때 그 다음에 위로와 소망, 힘과 용기 등이 찾아옵니다. 설교를 통해 마음이 먼저 찢어져야 합니다. 아파야 합니다.

인생의 주춧돌 (2)

기독교를 대항하는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믿음을 지켜 나가는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나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리 혹은 나의 소리를 듣고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믿음을 지키는 삶의 비결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 시절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도망치기도 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한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신앙은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왕으로 계실 때 이루어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들 안에 세상과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 놓아 예수님을 모실 자리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불안과 걱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자신이 왕으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왕이 아닌데 왕처럼 살아가면 역적 죄로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왕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것으로 즉 왕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 만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빌 3:7-9). 인생을 세워 나가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인생의 집을 세우고자 하면 그 인생의 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의 집을 세워주면 그 인생의 집은 튼튼한 집이 됩니다. 우리 인생 집의 주춧돌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삼고 살아갈 때 심령 속에 그리고 삶 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부어지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 대로 아름다운 인생이 세워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말짱 도루묵 신앙’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애를 썼는데 그 결과가 헛되거나 혹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을 때 ‘말짱 도루묵’이라고 말 합니다. 조선 중기 인조는 청 나라의 침공을 피해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금방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피난 생활이 길어졌습니다. 갖고 갔던 식량이 바닥이 나자 현지에서 나는 맛없고 거친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하루는 한 어부가 직접 잡았다면 한 생선을 가져왔습니다. 나인이 요리한 생선살을 먹고 인조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선 살이 입안에서 스스로 녹을 정도로 맛이 있었습니다. 인조는 어부를 불러 생선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어부는 ‘묵’이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목어’ 인데 그 지방 사투리로 발음한 것입니다. 인조는 이런 귀한 생선을 ‘묵’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은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후로 그 생선의 이름은 ‘은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피난 때에 먹었던 은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수란간 최고 요리사에게 은어를 요리하여 가져오게 했습니다. 인조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은어 요리를 먹었는데 웬걸 맛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전의 맛과는 너무 달라서 인조는 자신이 먹은 생선이 은어가 맞는지 거듭 확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맛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인조는 말했습니다. “오늘 이 후로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 그래서 이 생선은 ‘도루묵’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 듯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이전의 나 중심, 나의 편리함, 나의 만족 그리고 육신의 정욕을 좇아가던 삶으로 돌아갑니다. ‘도루묵’의 신자가 되어 살아 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도루묵’의 신앙은 지금까지 해 온 신앙의 애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때’가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뿌릴 때와 거둘 때 사이에는 ‘가꿈’이 반드시 있습니다. 물을 주며, 잡초를 제거하며 그리고 거름을 줍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꿈’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며, 나 자신을 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 답게 신앙의 변덕쟁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신앙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주춧돌 (1)

 <인생의 주춧돌(1)> 우리는 어느 때보다 반 기독교적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 아시아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 등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은 문화와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살아갔던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반 기독교적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상 부와 권력 등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무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성전 맡은 자입니다. 그들은 당시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력자들이 힘 없는 두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함” (2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배층이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극도로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 전파와 행하신 기적들이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자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까봐 바리새인들과 내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자 그들을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남자 만해도 오천 명이 넘게 예수님을 믿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니 생명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려움들과 유혹들로 인하여 믿음을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충성스러웠던 신앙을 추억으로 삼고 여러 가지 핑계로 신앙의 변질을 덮으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이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어둡고 또한 어둡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어둡게 살 것인지 아니면 빛을 드러내며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품에 안겨 있는데 주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갈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신 데 이를 버리고 세상을 주인으로 삼고 살 것입니까? 성도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춧돌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한 빛을 비추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을 세우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