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최고의 삶을 살고자 하십니까?
최선의 오늘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지 깨닫는 것입니다. 시편 8편 5절은 “그를(사람)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존귀”는 ‘은혜’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도와주며 좋은 것들을 대가 없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로 주고자 하십니다. 그의 선하심과 긍휼 가운데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모함 속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줍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우리가 대단하거나 뭔가 특별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속에 그의 영화와 존귀를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신분의 혜택을 누리는데 영적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좋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 밖에 일이 수월하게 풀어집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팽개치고 나의 일을 도와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손길입니다. 요셉이 기가 막힌 상황 속에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은혜의 손길들을 입었습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니 환관장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최고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한다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오직 그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오직 은혜’.
2025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세상의 삶 속에서 수많은 말들과 소리들을 듣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어느 말과 소리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본문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딤후 3장 15절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입니다(롬 10:17).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충만한 기쁨을 안겨다 줍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52절) 하게 되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죄로부터 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은 ‘기쁨’을 잃고 말았습니다. 죄는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늘 목마르게 만듭니다. 세상 문화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이 될 때 마음과 삶이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말씀을 품으면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온유함과 기쁨, 절제와 인내, 화평과 충성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소망이 회복되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025
구원을 위한 빛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손길에 잡힌 선한 일꾼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생생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늘 성령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만들어 내신 역사의 기록입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고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을 주도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한 일꾼들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를 세워 가고 계십니다. 바울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역사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갔듯이 오늘날 우리들도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야 하는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 말씀 4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의 빛”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비방과 박해를 받아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이방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방의 빛”으로서 성령께서 맡겨 주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 순종을 하게 될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는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붙들고 살아갈 때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듯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우리 역시 사명자로서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방인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빛은 본래 ‘이방인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의 빛’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믿어 그를 우리 삶 속에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어 나는 죽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빛” 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빛입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구원을 위한 빛’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2025
영혼의 안전을 지켜야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시조 중에 <탄로가>가 있었습니다.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그 시조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늙어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모든 피조물은 늙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국에서 바지를 하나 사려고 시장 가게에 갔습니다. 허리 사이즈를 묻던 주인 여자가 두 팔을 벌려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더니 “할아버지 36”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목사님은 순간 기분이 상했습니다. ‘아니 굳이 할아버지라고 부를 필요가 있나? 아저씨라는 말도 있고, 이왕이며 기분 좋게 ‘오빠 36’ 라고 불러주면 좋을텐데.’ 하지만 자신이 할아버지 나이가 된 것이 사실이니 호칭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언제부터 인가 나이드신 분을 호칭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 역시 ‘할아버지’ 호칭을 듣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나 역시 할아버지가 되는 나이 때문에 그 호칭을 부르고 싶지 않게 된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늙음을 인정하기 싫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젊고자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늙어지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부고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을 애쓰기 보다는 영원한 나라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들 두려워하라(마 10:28).” <탄로가>의 시조처럼 늙음은 지름길로 우리를 찾아오니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구주로서 믿고 그와 날마다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 소리를 들어도 영혼은 ‘오빠’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