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나는 예수님의 종
예수님께서는 친히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일부러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분인고로 예수님처럼 종 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왜 종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이 있었는데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 대상에서 많이 제외가 되는 바람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도들은 자신들의 섬김 내용이 구제가 하나님의 말씀 증거와 기도 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량과 재정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을 택했습니다, 일곱 명의 집사를 뽑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의 ‘봉사’, ‘섬김’은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디아코노스’는 ‘일꾼’, ‘하인’ 등의 의미입니다. 결국 교회의 직무는 ‘계급’이 아니라 ‘봉사 직’ 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로서 예수님과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요, 하인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서 기도, 물질 그리고 재능으로 교회를 섬기며 또한 다른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 모두는 하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일꾼의 마음으로 교회의 손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호도와 취향으로 교회를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뜻과 명령에 따라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자원함으로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 자신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른 섬김이 이루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놀라운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에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교회를 섬기면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모든 일에 예수님의 눈을 의식하고 예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님을 뵙는 날에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고대하며 예수님과 그의 교회를 열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2025
열정을 나누는 사람!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너 열심을 다해 늘 충성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 봉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 342). 사람은 열정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막상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경험하는 압박, 긴장 그리고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열정으로 살아가기기 쉽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는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다가 세월이 흐르면 열정보다는 정으로 살아갑니다. 처음 직장에 들어갈 때는 열정을 품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 일터에 나가는 것이 싫어 지게 됩니다. 처음에 직분을 맡게 되면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교회를 섬기는 데에 열정적이다가 시간이 흐르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혹은 건성 건성으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누구든지 한때 미래를 열광하고 꿈을 꾸었으나 지금은 열정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매일 새로운 열정을 보충하며 살아가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새로운 만나를 주신 것은 어제의 열정이 오늘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의 열정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열정’의 단어 ‘enthusiasm’은 ‘하나님이 영감을 일으키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en theos’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우리는 우리 속에 매일 하나님의 영감을 새롭게 채워놓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로 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 담대함과 확신, 자존감과 겸손, 사랑과 인내 등을 통해 우리는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로마서 12:11은 선포합니다.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는 “열심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는 데에,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열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니 우리는 힘써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불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감사를 해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장에 대한 불평보다는 직장과 사업장 자체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 가정을 돌보는 일 등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뿐 더러 너무 힘이 듭니다. 내 시간과 자유를 빼앗긴 비참한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내 가정과 교회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 가정과 교회 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감사하면 새로운 열정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됩니다. 열정을 퍼뜨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25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친밀감의 사랑, 죄인이며 원수였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불 같은 열정의 사랑 그리고 독생자를 죽게 하신 하나님의 헌신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즉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인생은 도둑질 당하며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 개의 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줄은 ‘교제의 줄’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는 줄은 ‘관계의 줄’ 입니다. 우리들이 ‘교제의 줄’을 놓아버리면 자동적으로 ‘관계의 줄’이 풀어지고 맙니다. ‘관계의 줄’이 끊어지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교제의 줄’을 잡으면 자연스럽게 ‘관계의 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며 약속하신 복들을 부어 주십니다. 친밀한 사랑은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예배’ 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과 가까이 만들어 줍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으로부터 은혜의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영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짐승의 밥이 되듯이 성도는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기도’입니다. 신앙 생활은 듣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길을 잃습니다.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며, 기도하는 사람이 영적 청력이 뛰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영적 대화를 기뻐하십니다. “나를 전심으로 찾고 찾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하신 약속대로 위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스위치를 켜기만 됩니다. 또한 기도할 때 믿음의 불을 붙여주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믿음의 불을 붙여주게 하는 통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약속 받은 하나님의 복들을 선포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해를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우리 역시 온전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2025
얼굴 값을 해야지요!
‘꼴값 떨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꼴’은 얼굴 혹은 몸의 형태와 자세를 의미하며, ‘값’은 ‘품격’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품격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 품격대로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비꼬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한때 교육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한다고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상이 ‘계몽주의’ 입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면 유토피아가 세워진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사람의 품격을 갖추게 한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이미 입증이 되었습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훨씬 더 크고 무겁습니다. 교육이 그 사람의 품성을 더 좋게 하거나 혹은 바꾸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꼴값’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꼴값’의 삶을 살아가려면 ‘눈’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눈’의 판단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꾸어지지 않으면 그 교회 생활은 종교 생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꼴값’ 달라지지 않는 것은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교만의 눈, 의심의 눈, 시기의 눈 그리고 무례한 눈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온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 생활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종교 생활의 견지에서 보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최고로 멋지며 본받을 만한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 기도 세 번, 일주일에 금식 두 번 그리고 모든 헌금들과 구제 활동 등은 그야말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꼴값은 전혀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교만과 위선 그리고 자랑과 자기 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겸손과 진실함 그리고 하나님 자랑과 하나님의 의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은 내 눈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세상의 판단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눈. 나의 선호도와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다스림을 사모하는 눈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나의 얼굴과 삶 그리고 말씨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