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상황에 따라 인생을 판단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초와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큰 자”로 인정을 받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그런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왜 세례 요한이 그런 의심을 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가 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그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특별히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기대감은 순전히 우리 편에서 판단하고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실 거야’ 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황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치를 갖고 살아가갑니다. 그런데 세상 속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내용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상황이 찾아옵니다. 염려하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길목마다 ‘이것이 아닌데’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의구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고 사람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품게 되며, 다시 인생을 세워가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십니다
2024
가장 뛰어난 신앙의 모습
가장 뛰어난 기도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음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바로 이 기도가 예수님과 마귀의 다른 점입니다. 마귀(계명성)가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선택을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의지의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혼과 의지가 없는 로봇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걸어오시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회개로 향하도록 만드시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를 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들어 두셨지만 우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작정 천국에 우리를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로 회개를 하도록, 천국에 들어오도록 가만히 하십니다. 절대로 강압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좌지우지 아니하십니다. 선택의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죄’도 없고 ‘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죄와 의는 의지적 자유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면 실상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려면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밝혀진 것을 범하는 의지적 행위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자기 중심적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의지는 우리를 위해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의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지가 좇아가는 것을 거슬려 의지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가장 위대한 것은 그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시킨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것이지만,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을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만 주의 주, 만 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가장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은 우리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이루어 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2024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많이 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give and take’ 입니다. 잘 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거나 혹은 착하면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에 간다는 원칙입니다. 즉 나 자신의 공로에 의하면 죽음 이 후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인간은 무능한 존재입니다. 롬 3:10-12절이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나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날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세상이 떠들썩 합니다. 논점은 ‘예수는 신인가 아니면 뛰어난 사상가인가?’ 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는 예수님은 사상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 1:15-16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요, 다스리시는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권능과 기사로 죄악으로 잘못된 인생을 능히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오면 못 고칠 질병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면 건강한 인생, 행복한 인생,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인생 그리고 하나님께서 본래 정해 놓은 아름다운 인생으로 고쳐지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해 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골 1:21-22). 우리 스스로 구원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어 주셔서 우리 죄를 없애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나의 주와 구주로서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024
견고한 신앙
우리의 신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온전한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잇는 분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확신은 신학적 교리에 멈추지 말고 우리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처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실성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거부를 당했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큰 고통과 무한한 연약함 가운데 ‘어찌하여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의심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함’에 대한 의심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하심과 그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쏟아내고 겉으로 드러난 증거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부정하는 모양으로 나타났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예수님은 보이셨고, 그 믿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했습니다. 신앙은 탁월한 사람들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우리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을 보면서 ‘저것은 산이다’ 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의를 하든 혹은 동의하지 않든지 간에 산은 산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산 만큼 견고한 사실로, 아니 산보다 무한히 변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주관적이지만, 오직 객관적 실재와 일치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산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의 믿음이 참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산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그 모습대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의 살아 계심과 말씀이 신앙의 반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