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성공자의 비결
리더십 전문가 Skip Prichard는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발간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선정한 ‘최고의 스승 100인’ 중 한 사람입니다. Skip Prichard는 성공의 비결은 <실패에서 배워라> 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실패를 합니다. 그런데 그 실패 후에 그 실패를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실패로부터 성공의 비결을 찾는 것이 성공자와 실패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성공의 5가지 교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내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2. 다른 사람이 아닌 내 꿈을 찾는다. 3. 변명하지 않는다. 4.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5. 시간의 절박함을 느끼며 목표에만 집중한다. Skip이 말한 교훈을 이렇게 응용하면 어떻습니까? <신앙 성공의 다섯 가지 비결> 1. 나는 하나님의 완제품이다. 2.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3. 핑계거리를 만들지 말라. 4. 믿음의 백성들과 교제를 한다. 5.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간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 모두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200만 백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손길로 애굽으로부터 나왔지만(부르심)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택하심) 출애굽 1 세대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12명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가룟 유다는 택하심을 입지 못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대제사장,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택하심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짧아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택하심을 입지 못한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했습니다. 스스로 팽개쳤습니다. 불순종과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신분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르심을 받았으면 순종의 믿음을 통해 택하심의 자리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들과 이 땅 위의 약속의 복들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2024
나의 왕은 누구인가(1)?
우리 인생과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욕망’ 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자기를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정욕’ 입니다. 이 정욕으로 인하여 인생 속에 많은 싸움이 일어난다고 야고보는 선포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욕심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욕심의 포로가 되면 영적으로 어둡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또한 대적을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베드로와 요한을 겁박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이 그들 인생의 주인이심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합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대주재”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인데 ‘소유자’, ‘절대 통치자’ 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절대 통치자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혹은 유대 종교 지도자거나 혹은 세상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통치자요, 자신들의 인생의 주인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슬 시퍼런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절대 통치자로서, 모든 것의 소유자이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갈 때 자신을 사랑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그가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지만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성공자가 되었지만, 사울은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바벨론 왕보다는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룻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았을 때 룻은 줍는 인생으로부터 주는 인생이 되었고,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행복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로 삼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욕망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되어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신앙이 우리를 복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됩니다. 내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2024
고통이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
오늘날 성도들에게 ‘은혜 있는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 내 믿음을 세워주는 설교,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 마음을 시원하게 설교 등등이라고 말들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단 한 사람이라도 ‘오늘 설교를 듣는 데 너무나 불편했어’ 하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열의 아홉은 마음에 불편한 설교, 듣고 싶지 않는 주제를 다룬 설교, 약점을 파 헤친 설교를 ‘은혜로운 설교’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플로리다에서 목회하고 있는 David Cassidy 목사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성도 중에 주일 설교를 듣고 이런 댓글을 남겨 두었다 합니다. “지옥이라도 온 것처럼 아프네요.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댓글을 보고 큰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지게 하는 데에 그 역할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온전하게 세우고자 할 때 반드시 따르는 것은 고통입니다. 상처를 치료하고자 할 때 반드시 소독을 먼저 해야 합니다. 소독약을 바르는 것은 고통과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살이 썩어 들어갈 때 연고만 바른 의사는 돌팔이입니다. 메스를 들어 썩어가는 부위를 도려내야 합니다. 엄청난 아픔이 동반됩니다. 그 다음에 연고를 바릅니다. 설교를 소망과 위로의 진리라고 말하지만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진리가 먼저 듣는 사람에게 와야 합니다. 소망과 위로가 진리보다 먼저 오는 것은 잘못된 설교이든지 아니면 잘못된 들음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만을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진리가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와서 그의 허물을 드러냈을 때 그 설교가 힘이 되며 위로가 되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나단의 설교는 다윗 왕의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포된 말씀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아팠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걸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날 선 칼이 나를 찌르며 쪼개는데 어떻게 아픔과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 아픔과 질병이 치료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이는 정상적인 치유는 없습니다. 성도는 진리를 통해 아파야 합니다. 불편할 정도로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 오늘 설교는 왜 이렇게 아프지?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될 때 그 다음에 위로와 소망, 힘과 용기 등이 찾아옵니다. 설교를 통해 마음이 먼저 찢어져야 합니다. 아파야 합니다.
2024
인생의 주춧돌 (2)
기독교를 대항하는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믿음을 지켜 나가는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나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리 혹은 나의 소리를 듣고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믿음을 지키는 삶의 비결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 시절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도망치기도 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한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순절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신앙은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왕으로 계실 때 이루어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들 안에 세상과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 놓아 예수님을 모실 자리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불안과 걱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자신이 왕으로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왕이 아닌데 왕처럼 살아가면 역적 죄로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왕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것으로 즉 왕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 만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빌 3:7-9). 인생을 세워 나가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인생의 집을 세우고자 하면 그 인생의 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의 집을 세워주면 그 인생의 집은 튼튼한 집이 됩니다. 우리 인생 집의 주춧돌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삼고 살아갈 때 심령 속에 그리고 삶 속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부어지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한 대로 아름다운 인생이 세워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