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교회와 세상 가치관
세상이 참으로 빠르게 변화가 되면서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섭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삶의 풍속도 엄청나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풍속을 보면 이전에는 혼전 임신을 쉬쉬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동거와 출산이 먼저 이루어지고 결혼식을 치룹니다. 혼전 임신이 오히려 축하를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결혼관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런 변화가 신앙 생활 안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보다는 사람 중심이 더 우선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신다’는데 굳이 교회에 나갈 필요가 있는가? ‘십일조는 율법적 명령이니 십일조를 굳이 안 해도 돼’, ‘주일 성수나 새벽 기도는 이 시대에 맞는 걸까?’ 등등. 이렇듯 신앙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론과 주장이 초신자나 신앙이 얇은 사람에게 신앙 성장의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교회 지도자나 신학자들이 신앙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많은 신앙인들이 혼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요, 또한 성경 중심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며,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교회를 통해 신앙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직장도, 학교도 아니며, 사교장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며, 천국의 훈련장이며 또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열릴 연회장입니다. 예배는 성도에게 있어서 특권이지 아름다운 의무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받아 세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움을 입는 것이 예배입니다. 헌금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오직 바른 예배를 통하여 성도는 성도가 되게 됩니다. 바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서 드려져야 합니다. 사람 중심의 신앙 생활은 심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025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만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뛰어야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한때 바울은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은 실상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다메석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은 어떤 삶의 모습이었습니까? (1)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후 그의 삶 속에서 항상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야만 신앙 생활이 천국이 됩니다. 신앙을 억지로 하게 되면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온통 예수님만 바라보며, 삶 속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날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어도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무늬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안팎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디딤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회심을 의심했지만 그런 바울을 도와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성도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같은 생각과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 무슨 일이든지 겸손함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세워주셨듯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디딤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며, 위로하며, 사랑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세워주는 삶을 평생 살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2025
나의 가치!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게 많은 사람들에게 K 드라마의 우수성을 알린 <폭삭 속았수다> 드라마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에게 딸이 엄마의 인생이 어떻는가에 물었을 때 할머니가 “하루 하루가 숨이 차는 인생” 이었다고 말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소풍이었소, 아니면 불행이었소?’ 라고 딸이 묻자 할머니가 대답을 합니다. ‘너희들을 낳아 평생 너희들을 보고 살았으니 소풍이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숨이 차도록 인생살이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생을 소풍으로 여긴 것은 자녀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차지하는 자리는 대단합니다. 어쩌면 한 가정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녀’입니다. 자녀 때문에 웃고, 울며 또한 행복해하며 불행 해합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녀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며, 가장 관심과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녀 때문에 ‘인생은 소풍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도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지극한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7-38).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느끼거나 확신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함을 가져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하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확신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능히 구원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2025
사울아, 사울아!
<사울아, 사울아!> 만남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좋은 만남은 인생 행복의 밑거름이지만 나쁜 만남은 인생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 입니다. ‘몸짓’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의미가 있는 인생 ‘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한 인생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 입니다. 바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만남이 ‘예수님과 바울’의 만남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당시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유럽에 들어간 복음이 미국에, 미국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듯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진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을 통해서입니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바울이 다메석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꽃’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꽃’의 인생 즉 의미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을 통해 누군가가 구원을 받고, 내 가정, 내 직장, 내 생업터, 내 교회 그리고 지역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영광스러운 향기를 드러내는 ‘꽃’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 속에 이 만남의 사건을 깨닫게 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 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그의 종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우연 속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였고, 그의 약속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천국 시민이요, 성도요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그의 자녀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꽃’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꽃’으로서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꽃이 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우리 역시 하나님의 꽃으로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꽃으로서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이제 우리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