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1)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저 말로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까? (1)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하여”의 헬라어는 ‘유세베스’ 인데 ‘신앙이 독실한’의 의미입니다. ‘경건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한결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을 묵상하여 삶 속에서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기분과 취향에 따라 적용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바꾸어지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경건한 신앙은 속사람이 변하는 신앙입니다. 생각이 달라야 합니다. 인격이 달라야 합니다.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갖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좇아가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게 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경건한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이 되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소금의 삶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의 복의 도구로서, 은혜의 도구 그리고 구원의 도구로서 사영하십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갔던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으며, 내 생각을 따라가지 않았으며 그리고 약한 자를 도와주며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 들어가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상을 받고자 하십니까? 경건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025
그리스도인의 삶의 단계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편의 단계, 위기 단계 그리고 확신 단계. 첫 번째 단계는 ‘편의 단계’인데 마치 편의점을 이용하듯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는지에 맞춰지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유익들에 주시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이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1 단계의 문제점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제한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께 순종하기기 편리한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 내가 편하면 순종하고, 불편하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수준이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위기 단계’ 입니다. 이 단계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단계입니다. 2 단계의 믿음의 특징은 누구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든지 아니면 돌아서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만날 때 두 번째 단계에서 예전 단계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기를 허용하실 때 우리가 단지 그 문제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갈망하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27편 8절입니다. “주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그의 손 만을 찾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얼굴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즉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와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세 번째 단계는 ‘확신 단계’ 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상황 속애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하고 순종적인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발전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주여, 나에게 복을 주세요’ 라는 태도보다는 ‘주여, 나를 받으소서’ 라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단계는 복을 구하기보다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2025
기적을 가져오는 신앙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 그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초청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신앙을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고 그 믿음을 선포하는 신앙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선포를 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병든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성도는 경험과 이성으로 예수님의 권능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권능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경을 꾸짖고, 문제들을 꾸짖고 그리고 병 낫기를 선포해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다윗은 그의 힘과 능력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속에 우리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중풍병만이 병이 아닙니다. 우리는 재정의 중풍병, 인간 관계 중풍병, 불안과 염려의 중풍병 – 성도는 이런 중풍병에 주저 앉아 있거나 누워있지 말고 예수님의 권능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 하노니 인생의 중풍병아 내게서 떠날지어다!’ (2) 기도가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나와 같은 일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 그 말씀이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자 한다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다니엘을 죽을 지도 모르는데 기도에 전혀 힘을 썼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보수를 위해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바다를 갈라지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줍니다. 지는 해를 멈추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을 가져오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2025
잘 죽어야 합니다!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될 때마다 항상 내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잘 죽어야 한다’ 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죽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살다가 죽는 것,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죽는 것 등등이 ‘잘 죽는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런 것들이 정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육신의 장막을 떠나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이 시시하게 여겨질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혹은 이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안달을 냈는가 싶어 좀 어이가 없고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잘 죽는 것’은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내가 어디에 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정답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정답을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는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풍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차고 넘치는 곡식을 위해 헌 곡간을 헐고 큰 곡간을 지어 곡식을 잘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 부자는 그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졌으며, 또한 누리고 싶은 것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누릴 만큼 건강했습니다. 누가 봐도 잘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는 잘 죽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삶’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되는 날 그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잘 죽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내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잘 살았는지를 몰라도 잘 죽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잘 죽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번 스스로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