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존재(Be)와 행동(Do)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중요한 동사는 ‘존재하다(be)’와 ‘행동하다(do)’ 입니다. 전자는 ‘존재’를 , 후자는 ‘행위’를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님께서 먼저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존재(됨됨이’ 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됨됨이(be)’가 항상 중요합니다. 구속(redemption)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 즉 존재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도덕적 결함이 없었다면 인간의 악한 행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본성)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다나 강이 오염되는 것은 오염 물질을 내놓은 공장이 있듯이 인간의 악한 행위 배후에는 악한 생각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을 정화하려면 먼저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해야 하듯이 인간의 행위를 바꾸려면 우선 인간의 본성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즉 ‘행위’가 의로워지려면 근원적인 ‘존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존재(본성)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씻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거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함’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봉사(do)’가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be)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들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물이 나니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용납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건성으로 혹은 전혀 경외와 존경이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우리들이 예배하는 행위, 물질을 드리는 행위 그리고 섬기는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행동들 속에 우리의 진실한 마음, 경건한 마음 그리고 믿음이 들어 있지 않는다면 그 모든 행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존재) 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행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존재와 행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존재’가 빠진 ‘행동’은 하나님 앞에 결코 흠향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의 ‘존재’(됨됨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2024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상황에 따라 인생을 판단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초와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큰 자”로 인정을 받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그런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왜 세례 요한이 그런 의심을 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가 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그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특별히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기대감은 순전히 우리 편에서 판단하고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실 거야’ 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황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치를 갖고 살아가갑니다. 그런데 세상 속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내용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상황이 찾아옵니다. 염려하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길목마다 ‘이것이 아닌데’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의구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고 사람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품게 되며, 다시 인생을 세워가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십니다
2024
견고한 신앙
우리의 신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온전한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잇는 분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확신은 신학적 교리에 멈추지 말고 우리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처음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진실성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은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거부를 당했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큰 고통과 무한한 연약함 가운데 ‘어찌하여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의심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함’에 대한 의심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하심과 그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쏟아내고 겉으로 드러난 증거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부정하는 모양으로 나타났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진실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예수님은 보이셨고, 그 믿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했습니다. 신앙은 탁월한 사람들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우리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을 보면서 ‘저것은 산이다’ 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의를 하든 혹은 동의하지 않든지 간에 산은 산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산 만큼 견고한 사실로, 아니 산보다 무한히 변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주관적이지만, 오직 객관적 실재와 일치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산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의 믿음이 참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산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그 모습대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의 살아 계심과 말씀이 신앙의 반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