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내가 왜 순종해야하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할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요 그리고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의 구주’와 ‘나의 주’’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순종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벧전 1: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 산 은혜’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을 포함합니다. ‘반쪽 자리 신앙’, ‘3분의 1의 신앙’ 혹은 4분의1의 신앙’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직무나 사역’(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순종하는 자식’ (벧전 1:14)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 주인은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창조주신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요, 반역이요 그리고 범죄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에게 죽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엡 2:2)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순종하는 자식의 특징을 보이며, 불순종의 습관에 빠져 있으며 그리고 불순종을 체질화 합니다. 불순종이 본성이 되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나의 주인이다’고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종’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세상 철학은 ‘개인주의’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순종의 사람입니까?
2024
복을 쟁취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령한 복은 세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을 때 즉시 받는 복입니다. 그것은 죄사함, 칭의, 중생, 하나님의 자녀가 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으로 물려받는 복입니다. 이 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장차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며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를 통해 얻게 되는 복입니다. 이 복은 가만히 있으면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복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이겨내며, 성령 충만 속에서 성도로서의 열매들을 맺으며 그리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주신 은혜를 통해 성장하며,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의식하며 예배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 복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서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담대히 들어가야 하듯이 우리 역시 담대함을 갖고 이 복을 차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처음 두 복들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미 그 복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것으로 이미 선포하신 복들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복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복을 차지하는데 방해하는 영적인 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내가 구하는 만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갈렙은 그가 받을 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위해 담대하게 싸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차지하기 위해 요청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리고 담대하면 담대할수록 그리고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의 복은 우리 것이 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도는 최고의 삶을 바라며 그리고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열매들을 맺어야 합니다. 성도는 적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큰 복을 구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열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024
존재(Be)와 행동(Do)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중요한 동사는 ‘존재하다(be)’와 ‘행동하다(do)’ 입니다. 전자는 ‘존재’를 , 후자는 ‘행위’를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님께서 먼저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존재(됨됨이’ 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됨됨이(be)’가 항상 중요합니다. 구속(redemption)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 즉 존재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도덕적 결함이 없었다면 인간의 악한 행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본성)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마음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다나 강이 오염되는 것은 오염 물질을 내놓은 공장이 있듯이 인간의 악한 행위 배후에는 악한 생각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을 정화하려면 먼저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해야 하듯이 인간의 행위를 바꾸려면 우선 인간의 본성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즉 ‘행위’가 의로워지려면 근원적인 ‘존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존재(본성)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씻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거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함’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봉사(do)’가 있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be)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들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물이 나니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용납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건성으로 혹은 전혀 경외와 존경이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우리들이 예배하는 행위, 물질을 드리는 행위 그리고 섬기는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행동들 속에 우리의 진실한 마음, 경건한 마음 그리고 믿음이 들어 있지 않는다면 그 모든 행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존재) 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모든 행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존재와 행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존재’가 빠진 ‘행동’은 하나님 앞에 결코 흠향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의 ‘존재’(됨됨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2024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상황에 따라 인생을 판단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초와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큰 자”로 인정을 받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그런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왜 세례 요한이 그런 의심을 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그가 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그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특별히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기대감은 순전히 우리 편에서 판단하고 소망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실 거야’ 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황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기대치를 갖고 살아가갑니다. 그런데 세상 속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내용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울어야 할 상황이 찾아옵니다. 염려하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길목마다 ‘이것이 아닌데’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의구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의심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내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고 사람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품게 되며, 다시 인생을 세워가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