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얼굴 값을 해야지요!
‘꼴값 떨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꼴’은 얼굴 혹은 몸의 형태와 자세를 의미하며, ‘값’은 ‘품격’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품격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 품격대로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비꼬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한때 교육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한다고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상이 ‘계몽주의’ 입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면 유토피아가 세워진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 사람의 품격을 갖추게 한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이미 입증이 되었습니다.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훨씬 더 크고 무겁습니다. 교육이 그 사람의 품성을 더 좋게 하거나 혹은 바꾸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꼴값’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꼴값’의 삶을 살아가려면 ‘눈’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눈’의 판단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바꾸어지지 않으면 그 교회 생활은 종교 생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꼴값’ 달라지지 않는 것은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교만의 눈, 의심의 눈, 시기의 눈 그리고 무례한 눈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온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 생활로 인해 주변의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종교 생활의 견지에서 보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최고로 멋지며 본받을 만한 종교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 기도 세 번, 일주일에 금식 두 번 그리고 모든 헌금들과 구제 활동 등은 그야말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꼴값은 전혀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교만과 위선 그리고 자랑과 자기 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겸손과 진실함 그리고 하나님 자랑과 하나님의 의의 삶을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은 내 눈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세상의 판단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눈. 나의 선호도와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다스림을 사모하는 눈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나의 얼굴과 삶 그리고 말씨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2025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성경 속에서 멸망을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불순종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당했으며, 징계 후에도 여전히 말씀을 무시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성도가 어떤 물질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거짓 신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 중의 가장 강력한 거짓 신은 ‘물질’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전무후무한 모습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물질을 공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삼고 그가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을 공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 라는 의미는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는 물질을 자신의 신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선한 일을 위하여 물질을 섬기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서는 팥 죽 한 그릇을 위해 하나님의 것을 무시했습니다. 삼손은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무시했습니다. 발람은 발락이 준 뇌물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위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성도의 물질관은 우리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그리고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도가 가져야 할 물질관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으로 살지 않고 위선적인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사랑과 헌신이 아니라 자기 자랑과 의를 더 위에 두었습니다. 결국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물질 전체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물질을 그들의 신으로 삼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물질의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나바처럼 진실함으로 성령을 좇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춰질 것이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진실함으로 교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2024
넌 하나님의 자녀야!
아버지와 아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만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덤불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릎에 까진 상처를 본 아들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와줘요!’ 그러자 어디서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도와줘요!’ 놀라 어리둥절한 아들은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아들이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너는 겁쟁이야!’ ‘너는 겁쟁이야!’ ‘너는 바보야!’ ‘너는 바보야!’ 그때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은 덤불에서 빼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껄껄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그것은 메아리란다. 메아리의 다른 이름은 ‘인생’이지.’ 그러면서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는 승자야!’ 역시나 목소리가 돌아왔습니다. ‘너는 승자야!’ 아버지가 또 말했습니다.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습니다. ‘아들아, 인생이 이렇 단다. 뭐든 네가 보내는 그대로 돌아오지.’ 지금 나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거 내가 내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때 죄인이었습니다. 장래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지금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장점들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단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단점 때문에 주눅이 들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단점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주저 앉아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단점을 가진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완전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해도, 부끄러운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자녀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원수였던 우리와 화해를 하셨으니 우리 역시 스스로 우리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약점을 가진 우리를 그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를 내어 놓은 아브라함을 사용하셨습니다. 실수투성이의 야곱을 약속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과 기도로써 우리를 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넌 하나님의 자녀야!
2024
나의 왕은 누구인가?(2)
<나의 왕은 누구인가 (2)> 성도는 인생의 왕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대 주재” 즉 ‘절대 통치자’ 이심을 믿었습니다. 성도는 절대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과 섭리로써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일하시는데 경륜과 섭리로 일하십니다. ‘경륜’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행사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섭리’는 인간의 믿음과 의지를 사용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며,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다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처음 지은 우주는 불로써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 단독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경륜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을 이루어 가실 때 개개인의 의지와 순종 그리고 믿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는 자에게 복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 경륜을 믿고 그를 예배하며, 소망을 두고 그리고 의지할 때 약속의 복을 차지합니다. 이것이’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본문 말씀 속의 베드로, 요한과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모든 핍박과 고통은 겉으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을 했으며, 그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그들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통치자임을 믿는 성도는 그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도록 힘써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좇아 멸망의 심판을 받는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가 각자 삶 속에서 이루어져서 영생의 상급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한 그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인생이 세우지고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