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새로운 삶을 살려면?
인생 중에 가장 소중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코끝의 호흡이 멈추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계획은 사라지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요, 한계입니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 이 후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을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계 20:13-14). ‘영생의 심판’과 ‘영벌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입니다. 사도 배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우리는 생명과 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새롭게 되는”의 원래 의미는 ‘다시 호흡하는’ 입니다. ‘다시 호흡하는’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의 호흡을 불어주셨습니다 (창 2:6).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잃어버렸습니다. 육체의 호흡은 죽음의 호흡입니다. 그래서 살면 살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호흡이 회복이 되면 인간을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성령’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게 됩니다. 믿는 자 안에 거하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성도는 상령 안에서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삶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기 위함입니다. 새롭게 하기 위함 입니다.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말씀 26절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서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합니다. “악한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빠져서 세상과 벗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무언가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 돌아서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때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호흡이 회복이 되어 죄로 죽었던 우리 삶이 살아나게 됩니다. 신선하게 됩니다.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2024
내 인생의 최고 보물
<내 인생의 최고 보물>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솔로몬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허무한 인생과 푯대를 정하고 살아가는 부름의 인생이 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걷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소망 없이 허무한 인생을 사람을 걷게 하고, 뛰게 하며 그리고 찬양의 인생으로 만들어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인생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고 부름의 상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광야 생활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앞의 환경과 상황 그리고 사람을 보며 살아가면서 불평과 낙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인생 속에 만나를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거두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인생의 생수를 제공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환경과 상황 역시 변화합니다. 사람 역시 변합니다. 어제나 올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품고 살아가는 믿음을 “영혼의 닻”과 같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인생의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하게 서 있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선포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인생 길을 걷다 보면 배부를 때가 있고, 배고플 때가 있습니다. 넉넉할 때가 있고, 부족한 때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반석으로 삼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 능력 그리고 도우심으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믿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인생으로 세워주십니다. 우리의 눈이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 도둑질을 당하며, 망하고 죽게 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세워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며, 최고의 사랑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또한 회복하게 하시는 우리의 최고 보물이십니다.
2024
인생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의 주체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도 단점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바로 요즘 말로 민중주의라고 하는 중우정치였습니다. 중우정치란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로, 민주주의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말입니다. 플라톤은 다수의 폭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의 ‘폭민정치’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빈민정치’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중우정치는 올바른 민주제가 시행되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단점이 심해지면 만들어지는 정치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팬덤정치, 그리고 패거리정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미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미국 역시 중우 정치의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바른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포퓰리즘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내의 신앙인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불량배와 같지만 기독교 가치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을 뽑을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흠이 덜 한 사람을 뽑을 것인지 – 이 두 가지 선택에서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사람의 손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사람 혹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은 느헤미야를 통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호의 호식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개인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하게 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포퓰리즘과 거짓 선동에 귀를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우리 귀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 혼자는 약하지만,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024
내가 왜 순종해야하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할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시요 그리고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의 구주’와 ‘나의 주’’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순종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벧전 1: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 산 은혜’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을 포함합니다. ‘반쪽 자리 신앙’, ‘3분의 1의 신앙’ 혹은 4분의1의 신앙’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직무나 사역’(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순종하는 자식’ (벧전 1:14)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네 주인은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창조주신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요, 반역이요 그리고 범죄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에게 죽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엡 2:2)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순종하는 자식의 특징을 보이며, 불순종의 습관에 빠져 있으며 그리고 불순종을 체질화 합니다. 불순종이 본성이 되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나의 주인이다’고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종’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세상 철학은 ‘개인주의’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순종의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