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어야 합니다!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될 때마다 항상 내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잘 죽어야 한다’ 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죽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살다가 죽는 것,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죽는 것 등등이 ‘잘 죽는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런 것들이 정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육신의 장막을 떠나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이 시시하게 여겨질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혹은 이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안달을 냈는가 싶어 좀 어이가 없고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오게 됩니다. ‘잘 죽는 것’은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내가 어디에 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정답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정답을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는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풍족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차고 넘치는 곡식을 위해 헌 곡간을 헐고 큰 곡간을 지어 곡식을 잘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 부자는 그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졌으며, 또한 누리고 싶은 것을 충분히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누릴 만큼 건강했습니다. 누가 봐도 잘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는 잘 죽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삶’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되는 날 그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잘 죽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내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잘 살았는지를 몰라도 잘 죽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잘 죽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번 스스로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